등단 17년만에 첫 로맨스 소설 펴내
인간의 육신만 지구에 남기고 모든 정신과 신경을 빼내 업로드, 홀로그램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상세계 ‘롤라’. ‘사막이 생겨라’ 하면 ‘짠’ 하고 사막이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천국이다. 하지만 이 천국에서조차 권태를 느낀 인간은 결국 ‘드림시어터’라는 주문자 맞춤형 가상세계를 탐닉한다. 드림시어터는 롤라로 들어오기 전 지구에서 살았던 자기의 삶을 가상현실로 옮겨 온, 그야말로 두 번째 인생을 살아볼 수 있는 통로다.
38개월 만에 내놓은 정유정(사진) 작가의 신작 ‘영원한 천국’은 가상세계를 기반으로 이야기가 흐른다. 책 출간일인 지난 28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출판사 은행나무에서 정 작가를 만나 하나도 아닌 두 개의 가상세계 롤라와 드림시어터를 창조해낸 까닭을 물었다. 그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많은 사람의 말과 일상이 저장되며 세상이 거대한 데이터베이스(DB)화가 진행되고 있다”며 “이게 끝까지 가면 인간이 불멸의 상태에 이르면서 자기 육체를 버리고 데이터화된 인간으로서 우주를 떠돌아다니는 홀로그램으로 저장될 수 있다고 상상했다”고 설명했다.
모든 것이 충족이 되는 가상세계 안에서 인간은 억겁의 시간 동안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 정 작가는 “인간은 놀이의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태어날 때부터 모든 걸 이야기로 배우고 이야기로 학습하고 세상도 다 이야기로 배운다”고 설명했다. 이어 “인간에게 마지막까지 남는 유희 놀이도 아마 서사 놀이일 것이다. 그러니 가상세계 안에서 조차 내가 직접 참여한 이야기 극장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책의 제목 ‘영원한 천국’은 반어적이다. 결핍이 없는 세계는 권태로운 지옥이라는 것이 정 작가의 설명이다. 그는 “인간이란 존재는 늘 뭔가 결핍돼 있어 원하는 것을 노력해서 쟁취하다 보면 언젠가 더 이룰 게 없어져 인생을 지루해 한다”며 “(이런 상황에서) ‘모든 게 거저 주어지는 천국이 있다? 이건 오히려 인간에게 지옥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정 작가의 소설은 ‘매운맛’과 ‘순한맛’이 퐁당퐁당 번갈아가며 나온다. 자기 파괴적인 그런 욕망을 다룬 ‘7년의 밤’, ‘종의 기원’, ‘완전한 행복’이 대표적인 매운맛 작품이라면, 이번 ‘영원한 천국’은 인간의 성취적인 욕망, 자유의지를 다룬 순한맛 계열이다. 그는 인간 태초부터 DNA에 각인된 ‘야성(野性)’을 회복하자는 메시지를 작품을 통해 던진다.
이 작품이 정 작가가 등단 17년 만에, 장편소설 8편 만에 쓴 첫 로맨스라는 점은 놓쳐선 안되는 포인트다. 30대 초반 남녀 두 커플의 로맨스 서사는 순애보의 원형이다. 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인스턴트 연애의 대척점에 있다. 하지만 신파로는 빠지지 않는다.
정 작가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며 “소설에 (생전 쓰지 않았던) 로맨스를 끼워 넣은 이유는 사랑을 하지 않는 요즘 젊은 세대에게 ‘괜찮아. 자기 자신을 다 던져서 사랑해도 인생에 결코 마이너스가 아니야’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어서였다”며 웃었다. 이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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