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 낚아채 스스로 머리에 쓴 황제
정복하고 또 정복…신들린 전쟁 영웅
결정적 오판에 일순간 추락해버리고
‘탈출’ 드라마 썼지만…재역전 못했다
그 순간, 모두가 숨을 죽였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전쟁광이자 전쟁영웅, 최고 전략가이자 잔혹한 침략자인 그는 교황 비오 7세의 손에서 왕관을 빼앗듯 낚아챘다. 당황한 교황을 뒤에 둔 채 이를 스스로 제 머리에 씌웠다. 자기가 황제 나폴레옹 1세로 오르는 건 신의 축복 따위가 아닌 본인 힘 덕이라는 양.
1804년, 12월. 나폴레옹은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대관식(戴冠式)을 치렀다. 그의 나이 서른다섯 살 때였다. 대관식이란 국가 지도자가 된 이가 왕관을 쓰는 예식을 의미한다. 종교적 의미도 큰 행사였기에, 현장에선 종교 권위자가 군주에게 손수 왕관을 씌워주는 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나폴레옹은 이 의식을 깼다. 나폴레옹은 자기 쪽으로 교황을 호출하는 배짱부터 보였다. 그리고 마지못해 온 교황에게, 그의 권리처럼 여겨지던 관 수여 의식마저 빼앗은 격이었다. 교황을 자기를 위한 조연으로 만든 셈이었다. 모든 이가 숨을 죽은 이유, 일순간 말을 잃은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정적은 잠시였다.
곧 나폴레옹을 향한 지지가 폭죽 터지듯 쏟아졌다. "철인", "국가의 영웅", "조국의 수호자"…. 그에게 온갖 번지르르한 칭호가 따라붙었다.
프랑수아 제라르, 대관식 예복을 입은 조제핀 황후, 1807~1808, 캔버스에 유채, 214x160.5cm, 퐁텐블로 궁전 |
나폴레옹은 이 분위기에 맞춰 대담한 행동을 이어갔다.
나폴레옹은 그의 아내, 이젠 황후가 된 조제핀 드 보아르네에게도 직접 관을 씌웠다. 곧 장엄한 음악이 울려퍼졌다. 황제의 탄생을 축복하는 기도문이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이 순간을 박제하는 이가 있었으니,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였다.
자크 루이 다비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1805~1807, 캔버스에 유채, 621x979cm, 루브르 박물관 |
나폴레옹 체제에서 수석 궁정화가를 지낸 다비드는 그의 대관식을 몇 년에 걸쳐 캔버스에 옮겨담았다.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이 그것이다.
화려한 복장의 나폴레옹은 빛나는 관을 머리 위로 든다. 직전에 스스로 관을 썼을 그가 이제 다음 순서로 조제핀에게 직접 황후의 자격을 주려는 순간이다. 번쩍이는 보석과 장신구를 두른 조제핀은 조금 전 정식 황제가 된 남편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곳에 모인 200여명의 모든 이가 또 한 번 숨소리를 낮춘다. 그리고 나폴레옹 뒤에서 앉아있는 남성, 그가 교황 비오 7세다. 흰 주케토를 쓰고, 검은 십자가가 그려진 옷을 입은 그의 표정은 굳어있다. 손가락을 들어 이 순간을 축복하고 있지만, 어딘가 경직되고 무언가 못마땅한 모습이다. 코르시카의 촌뜨기에서 장교, 제1통령, 그리고 황제. 나폴레옹은 어떻게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 이것은 18세기가 낳은 유럽 최고의 군사 천재이자 악마, 투사이자 군국주의자의 이야기다.
나폴레옹은 1769년 코르시카의 아작시오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곳은 유럽에서 가장 낙후한 섬이었다. 그가 출생할 무렵 이탈리아 제노바 공화국에서 프랑스로 소속이 바뀐, 그래서 더 어수선한 땅이기도 했다.
안톤 라파엘 멩스, 나폴레옹의 아버지, 1766~1779, 캔버스에 유채, 116x92cm, 메종 보나파르트(보나파르트의 집) |
나폴레옹은 이곳에서 나름대로 귀족이긴 했다. 프랑스 점령군과 코르시카 독립군 사이 충돌이 있을 때 아버지가 점령군 편에 선 덕이었다. 그 결과, 일이 잘 풀린 후 프랑스 왕실에 귀족 작위를 따낼 수 있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이러한 아버지로 인해 군인 꿈도 펼칠 수 있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장교에 오르려면 귀족 작위가 필수였다. 나폴레옹은 파리 군사학교에 다녔다. 나폴레옹은 58명 중 42등으로 졸업했다. 다만 그는 집안 사정 탓에 11개월 만에 3~4년 과정을 공부해야 했다. 저 멀리 코르시카에서 왔다는 게 알려진 뒤에는 다른 학생들에게 "섬 사투리를 쓰는 촌뜨기"라는 식의 놀림도 받아야 했다. 이런 어수선했던 환경을 감안하면 상당히 선전한 셈이다.
나폴레옹은 1785년, 열여섯 나이로 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소위에 올랐다.
그리고 1789년, 나폴레옹이 지방에서 근무를 이어가던 그때 사건이 터졌다. '자유, 평등, 우애(박애)'를 이념의 주춧돌로 둔 프랑스 대혁명이었다.
장 밥티스트 에두아르 데타이유, 툴롱 공성전에서의 나폴레옹, 1890년경, 판지에 물감 등, 73.5x49.5cm, 파리 군사 박물관 |
앙시앵 레짐(옛 제도·체제)이 흔들리는 이 상황에선 자기 능력과 수완, 운만 있으면 누구든 돋보일 수 있었다.
혁명 정부가 젊고 유능한 이 군인에게 맡긴 첫 중요 임무는 툴롱 내 반란 진압이었다. 당시 혁명에 반(反)하는 왕당파, 혁명의 광풍 자체를 견제하기 위해 이들을 도운 영국군 등이 툴롱을 흔들고 있었다. 이곳은 프랑스 해군의 핵심 기지였다. 이러한 땅이 왕당파에 넘어가면 치명적 역풍이 불 게 분명했다. 1793년, 정치력을 발휘한 나폴레옹은 이 전투에서 혁명군 포병 지휘의 전권을 얻었다. 지도를 펼친 그는 깃발만 꽂으면 상대방 보급로가 끊어지는 언덕을 귀신처럼 찾아냈다. 나폴레옹은 순식간에 승리를 거머쥐었다.
신화는 이제 시작이었다.
나폴레옹은 이어 1796~1797년 이탈리아 원정, 1798~1799년 이집트 원정 때도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다. 특히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 중 북부 쪽에 주둔하던 오스트리아군을 궤멸에 가깝게 제압했다.
앙투안 장 그로, 아르콜 다리 위의 나폴레옹, 1796년경, 캔버스에 유채, 134x104cm, 예르미타시 박물관 |
당시 사건 중에는 매번 앞장서는 나폴레옹이 '꼬마 하사관'이라는 별명을 얻은 로디 전투, 필사적 방어 태세를 갖춘 오스트리아군을 나폴레옹이 그의 지휘와 전술로 깨부순 아르콜 다리 전투가 특히나 알려져 있다.
다비드의 제자 앙투안 장 그로는 나폴레옹을 위해 〈아르콜 다리 위의 나폴레옹〉을 그리기도 했다. 나폴레옹이 직접 삼색기를 든 채 적진 한가운데 뛰어든 모습이다. 그런 그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며 주춤하는 병사들을 격려하고 있다. 어느덧 나폴레옹은 군인의 우상을 넘어 국민의 영웅 자리에 올랐다. 프랑스 국민은 대혁명 후에도 끊이질 않는 지도층의 반목과 내전에 질려있었다. 국민은 제힘으로 두각을 보인 나폴레옹에게 압도적 지지를 보이기 시작했다. 약삭빠른 나폴레옹이 그런 분위기를 모를 리 없었다.
장 레옹 제롬, 스핑크스 앞에 선 나폴레옹, 1867~1868, 캔버스에 유채, 61.6x101.9cm, 허스트 캐슬 |
이집트 원정 2년 차였던 1799년, 8월께. 나폴레옹은 몰래 그곳에서 탈출했다. 나폴레옹이 간 곳은 파리였다. 그는 대담한 일을 벌였다. 쿠데타를 일으키고 제1통령에 오른 것이다.
이쯤에는 온 우주가 나폴레옹 편에 선 듯했다.
1800년, 5월. 국가 정상이 된 나폴레옹은 다시 한번 이탈리아를 쳤다. 그는 군대를 끌고 무려 알프스산맥의 험준한 협곡을 넘기로 했다. "불가능에 도전하라!" 나폴레옹의 외침과 함께 시작된 행군은 알프스를 넘고 밀라노를 짓밟을 때까지 이어졌다. 앞으로, 계속 앞으로. 나폴레옹은 곧 이탈리아 북부, 벨기에와 룩셈부르크까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에게는 이제 정복왕이라는 칭호도 어색하지 않았다.
자크 루이 다비드,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1801, 캔버스에 유채, 246x231cm, 빈 미술사 박물관 |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알프스산맥을 넘는 그 순간도 화폭에 옮겼다.
제목은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이다. 나폴레옹의 모습은 당당한 영웅 그 자체다. 근엄한 표정에 산꼭대기를 가리키는 손, 근육질의 성난 백마 등 모든 게 완벽하다. 치솟은 말발굽 밑 바위에는 그의 이름 '보나파르트'가 쓰였다. 그보다 앞서 알프스를 넘은 옛 영웅들,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롤루스 대제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사실 실제로 나폴레옹은 혹한과 빙판길, 암살의 위험 등으로 이처럼 값비싼 치장을 할 수 없었다. 그가 알프스를 넘을 때 탄 것 또한 노새였다. 하지만 어쩌랴. 역사가 당시 승자의 것이듯, 역사화(歷史畵) 또한 그 시대 승자의 것이었다.
이제 무서울 게 없어진 나폴레옹은 제1통령을 넘어 황제가 돼 안정적으로 통치를 이어가고 싶었다.
혹시나 문제가 생기면 그의 핏줄이 과업을 받들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래서 대관식을 갖고 나폴레옹 1세로 거듭난 것이었다. 파격적 장면이 연이어 등장했던 대관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화려했다. 의상과 마차 모두 새로 만들었고, 세계 각지에서 가장 값비싼 유물도 쟁여왔다.
자크 루이 다비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나폴레옹의 어머니), 1805~1807, 캔버스에 유채, 621x979cm, 루브르 박물관 |
자크 루이 다비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조제핀), 1805~1807, 캔버스에 유채, 621x979cm, 루브르 박물관 |
다만 모든 게 다비드의 찬란한 그림처럼 완벽하지는 않았다.
가령 그림에선 나폴레옹의 어머니 레티지아가 귀빈석에 앉아 흐뭇하게 웃는다. 사실은 당시 나폴레옹과 사이가 좋지 않아 참석도 하지 않았다. 황후 조제핀도 20대 여인으로 그려졌지만, 실제로는 40대가 넘은 상태였다. 허수아비가 된 교황 또한 세 손가락을 앞으로 모으는 축복의 표시를 순순히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역사화가 또 한 번 승자의 편에 선 셈이었다.
나폴레옹은 왕좌에 앉을 틈도 없이 또다시 전쟁을 준비했다. 그에게 정복욕은 바닷물 같았다.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만 커질 뿐이었다.
나폴레옹은 1805년 10월에 오스트리아 빈을 함락했다.
2개월 후 모라비아(현재의 체코 동쪽 지역) 아우스터리츠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재격돌했다. 오스트리아군은 당시 러시아군과 손을 잡은 상태였다. 이로써 구도는 프랑스 대 오스트리아·러시아 동맹군으로 짜였다. 전장에선 프랑스군이 확실히 불리했다. 오스트리아는 여전히 유럽의 맹주였다. 러시아 또한 압도적 영토와 인구를 품은 강국이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 당시(1805년 12월1일) 동맹군(빨간색)과 나폴레옹군(파란색)의 대치 |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은 이 전투를 예술로 승화한다.
전쟁 초기, 양측은 모두 군을 좌익과 우익, 중앙군으로 편성해 대치했다. 동맹군은 진지에서 전략을 짜던 중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나폴레옹군이 전장 우익(나폴레옹군 기준)에 있는, 목 좋은 언덕인 프라첸 고지를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나폴레옹군은 우익에 굉장히 소수의 병력만 배치한 듯했다.
천하의 전쟁 귀신이 이런 실수를?
동맹군은 상당수 병력을 보내 이 고지를 선점하고자 했다. 그리고 기세를 몰아 나폴레옹군의 우익부터 짓밟으려고 했지만…. 주변이 온통 산과 물로 가로막힌 이곳은 진격을 이어가는 데 적합하지 않았다. 외려 농성에 알맞은 곳이었다. 물론 거기서 시간을 벌어도 되지만, 문제는 동맹군의 나머지 두 진영이었다. 전력의 큰 부분이 이 언덕에 묶여있는 만큼, 동맹군의 좌익과 중앙군 모두(나폴레옹군 기준) 힘이 빠져있을 수밖에 없었다. 동맹군은 이제야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알아차렸다.
사실, 이 모든 게 나폴레옹의 작전이었다.
나폴레옹은 일부러 동맹군의 주요 전력을 '빛 좋은 개살구'인 프라첸 고지로 유인한 것이었다.
이들이 뒤늦게 우왕좌왕하는 사이, 이 덕에 적의 공격망에서 벗어난 나폴레옹군의 좌익이 맞은 편에 있는 동맹군을 쳤다.
동맹군은 당황했다. 동맹군은 고지에 발이 묶인 자기네 우익(나폴레옹군 기준) 대신 중앙군을 원병으로 내보냈다. 나폴레옹군은 이제 자신의 중앙군을 동맹군의 더더욱 빈약해진 중앙군을 향해 출격시켰다. 좌익과 우익 등 양옆으로 살덩이가 뜯긴 동맹군의 중앙군은 더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상대편의 중앙을 손에 넣은 나폴레옹군은 좌익과 우익의 동맹군 또한 '샌드위치' 상황으로 몰아넣어 격파했다.
프랑수아 제라르, 아우스터리츠 전투, 1810, 캔버스에 유채, 510x958cm, 베르사유 궁전 |
나폴레옹은 전투 후 병사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황좌에 앉은 나폴레옹, 1806, 캔버스에 유채, 260x163cm, 파리 군사 박물관 |
이제 유럽 대륙 전체가 나폴레옹에게 무릎을 꿇는 것 같았다.
다비드의 또 다른 제자인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가 이 무렵 〈왕좌에 앉은 나폴레옹〉을 주문 제작했다. 황금 월계관, 금으로 꾸민 튜닉과 망토, 발밑 독수리는 그의 절대 권력을 뜻한다. 신 중의 신 제우스를 떠올리게 하는 표정과 자세는 그가 품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위상을 의미한다. 그런 나폴레옹에게 눈엣가시는 한 나라뿐이었다. 섬나라 영국이었다.
모리스 오렌지, 크렘린궁을 떠나는 나폴레옹, 1916 |
여전히 강하고, 여전히 말을 듣지 않는 영국에 대해 나폴레옹은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대륙 봉쇄령이었다.
앞으로 그의 발밑에 깔린 유럽 대륙은 영국과 일체 무역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해 영국의 목을 조를 계획이었다. 하지만 영국은 돌파구를 찾았다. 각지에 뻗은 식민지와의 교역을 늘리고, 거기서 창출한 돈과 특산물을 꽉 쥔 채 외려 대륙을 압박했다. 이제 말라 죽을 곳은 영국과 활발하게 수출입을 이어가던 국가, 러시아였다. 결국 러시아는 영국과 몰래 무역선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의 일탈을 본 나폴레옹은 본보기 삼아 러시아에 포탄을 퍼붓기로 했다. 이때 그가 생각하지 못한 게 있었으니, 러시아의 혹독한 기후였다.
프랑스군 입장에선 말 그대로 미친 추위였다.
1812년, 9월 15일. 나폴레옹군은 러시아 모스크바 땅을 밟았다. 나폴레옹은 진작에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도망쳤다는 걸 알았다. 그렇기에 모스크바에 죽치고 앉아 투항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너무 추웠다. 심지어 모스크바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사기가 떨어진 군사 일부는 폭도가 될 조짐도 보였다. 이런 가운데 알렉산드르 1세는 협상을 할 기미조차 없었다. 이것은 알렉산드르 1세의 노림수였다. 그는 알고 있었다. 나폴레옹군이 우리네 시간끌기 작전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아돌프 노던, 모스크바에서 퇴각하는 나폴레옹, 1851, 캔버스에 유채, 120x95cm, 위치불명 |
버티던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 오고 한 달여가 흐른 10월 19일, 철수를 명령했다.
위대한 장군의 위대한 군대는 이제 모든 일에 질리고 지친 오합지졸이었다. 끝내 추위, 지긋지긋한 러시아군의 기습 탓에 초토화되고 말았다. 독일 화가 아돌프 노던이 당시 나폴레옹의 모습을 상상해 그렸다. 그의 〈모스크바에서 퇴각하는 나폴레옹〉을 보면, 굴욕감에 찬 나폴레옹이 깡마른 백마에 올라타 힘겹게 나아가고 있다. 잔뜩 움츠린 병사들은 거리의 피란민처럼 보인다. 몇몇은 이미 눈발에 굴복해 쓰러졌다. 참담하고, 참혹하다.
패배, 끔찍한 패배, 절대적 신이자 악마였던 자의 패배.
이 소식은 그간 나폴레옹에게 굴욕당한 유럽 국가들을 뭉치게끔 했다. 나폴레옹 타도를 내건 대프랑스 동맹은 다시 힘을 얻었다. 1813년, 10월. 연합군과 나폴레옹군은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최후 결전을 벌였다. 러시아 원정 실패로 후유증이 컸던 나폴레옹은, 과거 그가 멱살을 잡고 흔들던 이 국가들에 패배하고 만다. 이때 나이가 마흔넷, 대관식을 하고 9년이 흐른 후였다. 연합군이 사실상 파리까지 손에 넣은 1814년, 나폴레옹은 퇴위를 선언했다. 그는 촌뜨기로 돌아가야 했다. 그의 유배지는 이탈리아 엘바섬이었다.
샤를 드 슈토이번, 엘바에서 나폴레옹의 귀환, 1818, 캔버스에 유채, 97x128.5cm, 개인소장 |
나폴레옹 대신 왕좌를 꿰찬 건 루이 18세였다. 약간은 둔감한 성격의 중도 성향 인물이었다.
프랑스 국민은 화끈한 추진력의 나폴레옹을 잊지 못했다. 연합군은 나폴레옹의 몰락 후 쏟아진 과실을 놓고 알력 다툼을 하기에 바빴다. 여기서 한 편의 영화가 또 등장한다. 나폴레옹, 빈틈만 보이면 물어뜯는 늑대 같던 이 사내가 1815년 2월에 엘바섬에서 탈출한 것이다. 나폴레옹은 정복의 향수에 젖은 프랑스군을 손쉽게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나는 자네들의 꼬마 부사관이다. 나를 쏘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여기 내 가슴을 쏘거라." 그는 이러한 대담한 말과 행동으로 병사들을 감화시켰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3월20일에 파리로 귀환했다. 그는 황제로 재즉위했다. "돌아온 폐하, 만세!" 프랑스 전역에서 함성이 울려퍼졌다.
앙리 엠마뉘엘 펠릭스 필리포토, 나폴레옹 초상화, 1835, 캔버스에 유채, 80x65cm, 베르사유 궁전 |
하지만 나폴레옹의 부활은 백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연합군은 여전히 나폴레옹을 두려워했다. 나폴레옹은 유배 중 병을 얻고, 고된 행군으로 체력도 빠진 상태였다. 두 차례(러시아 원정·라이프치히 전투) 결정적 패배를 겪었기에 대군을 모으는 일 또한 당장은 어려웠다. 그래도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이었다.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었다. 연합군은 나폴레옹에게 또 싸움을 걸었다. 나폴레옹은 황제에 오른 그해 6월 워털루 전투에서 간발의 차로 패배했다. 다시 모든 걸 잃은 꼬마 하사관은 아프리카 대륙의 섬 세인트헬레나로 보내졌다. 6년간 유배 생활을 이어간 나폴레옹은 1821년 5월5일 사망했다. 쉰두 살 나이였다. 그에 대한 부검 결과지에 사인은 위암으로 쓰였다. "…군대, 군대의… 선봉." 나폴레옹은 정신을 잃기 전 이런 말도 남겼다고 한다. 이토록 파란만장했던 삶을 축약하는, 이만큼 더 적절한 말이 있을까.
〈참고 자료〉
새로 쓴 프랑스 혁명사, 장 클레망 마르탱, 여문책
나폴레옹, 앤드루 로버츠, 지식향연
나폴레옹, 프랭크 매클린, 교양인
전쟁의 기술, 로버트 그린, 웅진지식하우스
나폴레옹 데스 마스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