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비투자 늘리는 삼성·SK는 허탈
용인클러스터 전력망 구축도 답보
반도체 영토 넓히는 美·日과 상반
첨단칩 韓비중 ‘31%→9%’ 경고
이달 23일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가 조성되고 있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용인반도체클러스터 부지 모습. [연합] |
[헤럴드경제=김현일·김민지 기자] 전 세계적으로 반도체 패권을 잡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각국에서 대규모 지원책을 내놓는 반면, 국내는 K-반도체를 키우겠다는 법안을 만들어 놓고도 끝내 국회 통과가 사실상 무산돼 자동 폐기되는 수순을 밟게 됐다. 결국 K-반도체 육성이 ‘허언(虛言)’에 그치는 사이 경쟁국들과 격차가 더 벌어지게 됐다는 우려와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28일 업계에 따르면 반도체 기업들의 연구개발비와 시설투자비 중 일부를 소득세나 법인세에서 공제해주는 투자 세액공제 특례가 올해 12월 31일자로 끝난다.
앞서 양향자 개혁신당 의원은 이를 2030년 12월 31일까지 6년 연장하는 내용을 담은 일명 ‘K-칩스법’(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을 지난해 12월 7일 발의했다. 그러나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법안이 계류된 채 21대 국회가 종료되면서 휴지조각이 된 것이다.
당시 양 의원은 “우리나라의 경우 첨단전략산업에 대한 세액공제 기한이 지나치게 짧아 장기적인 투자계획 수립에 어려움이 있어 국내 첨단전략산업의 경쟁력 저하가 우려된다”며 세액공제 연장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했다.
지난 2022년 시행된 국가전략기술 세액공제 특례는 반도체를 비롯해 디스플레이·이차전지·바이오 등 7대 산업 66개 기술을 대상으로 적용돼 왔다. 시설투자비의 15~25%, 연구개발(R&D)비의 30~50%를 다시 돌려주는 제도다.
특히 반도체의 경우 ▷메모리는 15나노미터(㎚) 이하급 D램 및 170단 이상 낸드플래시 설계·제조기술 ▷시스템반도체는 차량용·에너지효율향상·전력반도체·디스플레이구동칩(DDI) 설계·제조기술 등을 대상으로 한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해 10월 약 20조원이 투입되는 경기도 기흥 차세대 반도체 연구개발(R&D) 단지 건설현장을 방문해 둘러보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
미국·일본·중국 등 경쟁국이 반도체 투자에 대한 막대한 보조금을 기업에 쥐어주는 것과 달리 우리나라는 보조금이 전무해 그나마 투자 세액공제 연장이 업계의 숙원으로 꼽혔다.
윤석열 대통령도 지난 23일 26조원 규모의 반도체 생태계 종합지원 방안을 발표하면서 반도체 기업 세액공제에 대해 “R&D와 설비 투자금의 일정 비율을 국가가 환급해주는 것으로 보조금이나 다를 바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윤 대통령은 “올해 일몰되는 세액공제를 연장해 기업이 R&D와 설비투자에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하겠다”고 밝혔으나 결국 물거품이 되면서 반도체 업계는 아쉬움을 숨기지 않고 있다. 특히 지난해 유례없는 최악의 반도체 업황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내다보며 시설투자를 아끼지 않은 기업들로선 허탈한 심정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연간 약 53조1000억원의 시설투자를 단행해 전년 수준을 유지했다. 반도체에 48조4000억원, 디스플레이에 2조4000억원을 집행했다. 올 1분기 시설투자액은 전년 동기 대비 6000억원 늘어난 11조3000억원을 기록했다. SK하이닉스도 1분기 시설투자액이 전년 같은 기간보다 1조2000억원 증가한 2조9430억원으로 집계됐다.
아울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622조원을 투입해 조성하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뒷받침하기 위해 발의된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 역시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해 산업계 우려는 다시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10월 김성원 의원이 발의한 이 법안은 8개월째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위에 계류된 채 국회 임기 종료를 맞았다.
그동안 산업계에서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해당 법안의 통과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해왔다.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에 제출된 검토보고서에 따르면 2027년부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반도체 팹(공장) 9개와 협력사 200여개가 입주하면서 2050년까지 약 10GW의 전력수요가 추가로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별법은 속도감 있는 전력망 구축을 위해 인허가 절차를 대폭 개선하고 차별화된 보상·지원 제도를 통해 국민 피해를 최소화 하는 등 전방위적인 지원 방안이 담겼다. 업계는 대규모 전력 공급망 구축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역주민의 반대와 지자체 인허가 지연으로 공장 건설이 늦어지는 문제를 막기 위해 특별법 처리가 절실하다는 입장이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해 9월 15일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에 위치한 용인반도체클러스터 현장사무소에서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SK하이닉스 제공] |
미국과 일본, 대만 등 주요 국가들이 반도체 생산기지 건설을 위해 속도전을 펼치는 상황에서 이번 법안 폐기는 한국 반도체 산업 경쟁력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이 재편되고 있는 가운데, 얼마나 빠르게 공장을 가동시키느냐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TSMC가 일본에 지은 제1공장이 대표적인 ‘속도전’의 사례다. TSMC는 지난 2021년 10월 일본 구마모토현에 파운드리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한 후 6개월 만에 착공에 들어갔다. 지난 2월 개소식을 열었으니, 건설 발표부터 가동까지 불과 28개월이 걸린 셈이다.
일본 정부와 지자체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어 가능했던 일이다. 우선, 일본 의회는 TSMC 공장 착공 전에 반도체 지원법을 통과시켜 보조금 4760억엔(약 4조2000억원)을 지급했다. 구마모토현은 ‘반도체 산업 강화 추진본부’를 만들어 통상 2년이 걸리던 인허가 절차를 6개월 만에 끝냈다.
SK하이닉스가 2019년 2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한 후 5년이 지난 지금까지 첫 팹(공장) 착공도 시작하지 못한 것과 대비된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내년 첫 팹이 가동을 시작해야 하지만 토지보상, 전력, 용수 등의 문제가 불거지며 시점이 크게 지연됐다.
미국과 일본은 반도체 공장 건설에 ‘통큰’ 직접 보조금도 지급하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지원법에 따라 생산 보조금 총 390억달러, R&D 지원금 132억달러 등 5년 동안 총 527억달러를 지원할 계획이다. 일본은 자국 반도체 산업 부활을 위해 약 253억달러의 지원금을 확보했고, 민간 투자를 포함해 총 642억달러를 반도체 산업에 투입하겠다는 방침이다.
반면, 한국은 제한적인 세제혜택 등의 지원만 제공하고 있다. 반도체 등 국가전략기술 시설투자에 15~25%의 세액공제 혜택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번 법안 폐기로 이마저도 축소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S&P캐피털IQ 자료에 따르면, 2018~2021년(평균) 한국 반도체 기업의 법인세 부담률은 26.9%로, 대만(12.1%)·미국(13.0%)·일본(22.3%)보다 높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공장 구축 속도전에 더 이상 밀려서는 안 된다고 꼬집었다.
업계 전문가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첫 팹 가동 목표 시점이 2030년인데, 이미 그때는 일본·미국·대만 등에 짓고 있는 신규 공장들이 한창 돌아가고 있을 시기”라며 “2030년 가동도 늦은 셈인데 전력 등 인프라 문제까지 불거져서 또 타이밍을 놓치면 한국은 반도체 생산 거점으로서 크게 도태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앞서 미국반도체산업협회는 보고서를 통해 10나노미터 이하 첨단 반도체 생산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2022년 31%에서 2032년 9%로 추락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대만의 비중도 69%에서 47%로 하락할 것으로 전망됐다. 한국과 대만의 빈자리는 미국, 일본, 유럽 등이 채울 것으로 예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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