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하는 작품>
휴식
책상 앞에 있는 여인
이젤이 있는 인테리어
빌헬름 하메르스회, '휴식'(일부 확대) |
빌헬름 하메르스회, '햇빛 속에 춤추는 먼지(Sunbeams or Sunlight, Strandgade 30)' |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그녀는 겨우 마음먹은 대청소를 끝낸 걸까.
간만에 텃밭 한 바퀴를 돌며 잡초를 뽑고 들어온 것일까. 그게 아니면, 종종 참석해야 하는 모임에서 힘을 다 빼고 돌아온 것일까. 그녀를 지치게 한 게 뭐였든, 당장은 해방의 순간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속 편히 머리카락을 묶어 올렸다. 옷 또한 평소 쉴 때나 입던 투박한 블라우스와 치마로 갈아입었다. 그런 다음 손에 잡히는 의자에 몸을 맡겼다. 상체를 등받이에 바짝 기댄 채, 이것만으로는 아쉬워 오른팔을 그 모서리에 살짝 얹었다.
"이제 좀 살겠어…."
그녀의 혼잣말이 들리는 듯하다. 그간 할 만큼 했으니, 이 순간만큼은 멍하게 있겠다는 생각일 게 분명하다. 은은하게 퍼지는 빛이 공간에 고요함을 더한다. 부드러운 질감의 벽지가 공기를 더욱 아늑하게 한다. 꽃 모양의 접시 또한 소박한 분위기를 이끄는 데 일조하는 모습이다.
빌헬름 하메르스회, 'Open Doors' |
쓱쓱….
"여보?" "나 여기 있소." "또 언제부터 와있었어요?" 익숙한 기운을 느낀 그녀는 허공에 대고 볼멘소리를 했다. 지금 그녀 뒤에는 남편이 이젤을 편 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화폭에 담는 건 쉬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이었다. "그대로 계속 있어 주게." "이제 그만 좀…. 어휴, 그래요. 알았어요. 아무렴요."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그러고는 다시 자기만의 휴식에 집중했다. 적막이 깔렸다. 캔버스에 닿는 붓 소리, 또르르 흘러가는 물감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남편도, 아내도 각자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둘 모두에게 현재 이 순간은 아주 익숙한 일상의 조각인 듯했다.
빌헬름 하메르스회, '휴식' |
이날 빌헬름 하메르스회(Vilhelm Hammershoi·1864~1916)는 아내 이다의 모습이 담긴 〈휴식〉을 그렸다.
하메르스회는 마침내 되찾은 평화를 만끽하는 이다를 화폭에 옮겨 담았다. 티끌만 폴폴 떠다닐 것 같은, 정적과 평온만이 넘실대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보다보면 이 그림에는 다른 화가들의 작품에선 쉽게 찾을 수 없는 특별한 힘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것은 압도적인 몰입감이다.
〈휴식〉의 감상자는 이다가 막 그녀만의 세계에 빠진 것을 안다.
잠깐이나마 모든 걸 놔버린 채 적요를 즐기고 있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차츰 감상자의 마음 한편에서도 묘한 감정이 피어오른다. 어느새 화폭 속 여인이 된 듯, 캔버스 안 잔잔한 방에 빨려들어간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휴식〉은 그렇게 이를 보는 사람의 마음도 차분하게 이끈다. 이 그림에 잠깐 눈을 담갔다가 뺀 이들은 그간 잊고 있던 깨달음을 얻는다. 그것은 그림 속 이다가 푹 빠져있는 오롯한 휴식의 필요성이다.
빌헬름 하메르스회, '침실' |
언젠가부터 우리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멈춰있는 법을 잊고 있다.
무슨 일이든 하나라도 더 빨리 해치우기 위해 세상을 힘껏 유영한다. 일정표를 빽빽하게 채워야 마음이 편하다. 기차와 지하철, 심지어 비행기와 휴양지에서도 타자기를 두드려야 죄책감이 덜어진다. 그 사이 친구를 만들고, 애인을 만들고, 누군가 자기를 좋아하게 만들기 위해 자처해 발장구를 더 강하게 친다. 일에 잠시라도 손을 놔버리면 뒤처질 것 같아서, 누군가와 함께 있지 않으면 괜히 소외되는 듯해서 멈추지 못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일은 할수록 더 많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누구든 만날수록 외로움만 커지는 기분을 마주한다. 모든 게 마시는 만큼 갈증만 더해지는 소금물인 양,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공허함만 깊어지는 경험을 한다.
빌헬름 하메르스회, 'A Room in the Artist's Home in Strandgade' |
우리는 서서히 지쳐간다.
어느덧 하나, 둘 피로한 사회 속 일원이 돼 살아간다. 그런데, 혼자 있다고 해서 과연 지는 건가. 잠깐 다 내려놓는다고 해서 모두에게 패배하는 건가. 자의든, 타의든 홀로 방에 앉아 완벽한 침묵의 시간을 보내본 사람은 안다.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걸. 당연히 처음에는 불안감이 밀려온다. 당장 뛰쳐나가지 않으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겠다는 생각에 짓눌린다.
다만, 이 순간을 견디면 그간 보기 힘들었던 게 보인다.
그것은 내 마음속 대화의 창이다. 차츰 나도 모르게 나에게 말을 건다. 내 과거가 어땠는지를 돌아보고, 앞으로는 어떻게 살면 좋겠는지를 자문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악착같이 사는 이 순간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없는지를 자신에게 물어본다.
이처럼 혼자만의 순간은, 조바심이 아닌 성숙함이 무르익는 시간으로 효과를 발휘하곤 한다.
"고독한 사람을 가만히 두라. 그 사람은 당신보다 수준이 높은 사람이다." 실존의 고뇌를 노래한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1875~1926)가 소설 〈말테의 수기〉에 쓴 문장처럼, 외려 홀로 사색에 잠겨있을수록 더 높은 경지의 착상도 떠오르곤 한다. 하메르스회의 작품은 이런 휴식의 기능을 잊은 우리에게 잠시 이입의 기회를 안겨준다.
빌헬름 하메르스회,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이다)' |
가령 하메르스회가 그린 〈책상 앞에 있는 여인(이다)〉도 그런 식이다.
여인은 햇빛 드는 방에 홀로 있다. 그녀 또한 〈휴식〉처럼 혼돈에서 벗어나 잠시 내면의 평화에 젖어든 듯하다. 뒤돌아선 그녀는 앞에 놓인 무언가에 몰두하는 것으로 보인다. 두 팔을 책상 위 들어올린 만큼, 무슨 글을 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여인은 무엇을 끄적이고 있을까.
그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영감을 메모하는 걸까. 마음의 창에서 건져올린 깨달음을 쏟아내고 있는 걸까. 확실한 건 인간은 자기에게 집중할 때 무엇이든 기록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곳에 홀로 있는 여인은 그 자체로 충만해 보인다. 그림을 보는 이의 마음은 괜히 아련해진다. 이러한 간접 체험을 통해 나 또한 저래도 좋겠다는 용기를 얻는다.
빌헬름 하메르스회, '자화상' |
하메르스회는 태생적으로 조용한 화가였다.
그는 평생 알고 지낸 이가 많지 않을 만큼 조심성이 컸다. 몇 없는 친구들과 마주 앉을 때도 시선을 마주치지 못할 만큼 내성적이었다. 종종 여행을 다녀오면 몇 날 며칠을 앓고 있어야 하는 스타일이었다. 하메르스회가 가장 오래 머문 곳은 다름 아닌 집이었다. 그는 동료 화가들이 외광(外光)을 좇아 쏘다닐 때, 둥글게 모여 입체파니, 추상인지를 떠들 때도 함께 있지 못하고 방에서 쉬어야 했다. 처음에는 강제된 휴식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아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한 순간들이었다.
빌헬름 하메르스회, 'interior from the Home of the Artist' |
그런데, 그런 하메르스회에게 어느 순간부터 새로운 세상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집에서 움트는 고요한 세계, 방에서 형성되는 사색의 행성이었다. 하메르스회 또한 그곳에서 마음의 창을 띄워 자신과 대화했다. 때로는 침묵으로 심연을 들여다봤다. 그는 이런 명상에 잠길 수 있는 잠잠한 실내가 점점 더 좋아졌다. 이곳이 시끄러운 바깥과는 전혀 다른 울림을 줄 수 있다는 점 또한 절감했다. 하메르스회는 그만의 그림을 통해 이 깨달음을 표현하고, 공유하고, 나아가 감상자 또한 해보기를 제안한 격이었다.
페더 세버린 크뢰이어, 'Summer Evening on the Souther Beach' |
페더 세버린 크뢰이어, 'Footprints in the sand' |
하메르스회는 1864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세상 빛을 본 하메르스회는 어릴 적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 그는 여덟 살 때 첫 미술 수업을 받았다. 타고난 재능 덕에 수월히 코펜하겐 왕립미술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졸업 후에는 화가 페더 세버린 크뢰이어(Peder severin kroyer·1851~1909) 밑에 들어갔다. 부드러운 색감을 장기로 둔 장인이었다. 하메르스회는 전통 교육기관에서 드로잉 등 기본기, 크뢰이어에게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끌어올릴 수 있는 기교를 익힐 수 있었다.
빌헬름 하메르스회, '어린 소녀의 초상' |
하메르스회는 1885년에 〈어린 소녀의 초상〉을 그렸다.
왕립미술학교 공모전에 출품한 공식 데뷔작이었다. 누이동생 안나를 그린 이 그림은 얼핏 보기에는 있는 그대로를 잘 옮겨담은 초상화에 가까워보인다. 그러나 화폭에 어우러진 어두운 색감을 보다보면 괜히 허한 감정이 올라온다. 그녀의 멍한 눈빛과 마냥 편해보이지는 않는 손, 얄팍하게 들어오는 햇살에서 처연한 마음도 느껴진다. 인상주의 대가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1841~1919)가 하메르스회의 태생적 고독함이 담긴 이 작품을 극찬했다. 하지만 기성 화단은 당시 아카데미즘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탈락 딱지를 붙였다.
실패를 경험한 하메르스회는 1887년부터 네덜란드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렘브란트 반 레인(Rembrandt van Rijn·1606~1669)과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1632~1675)가 나고 자란 이곳에서 공부를 이어갔다. 1889년에는 프랑스 파리 만국 박람회에도 참여했다. 그 여린 몸을 이끌고 영국과 독일 등도 탐방했다. 그리고 다시 코펜하겐 땅을 밟았다. 그동안 하메르스회는 당시 유럽 대륙에서 몰아치는 인상주의의 물결에 녹아들지 못했다. 차츰 고개 드는 입체파와 추상회화에도 흥미를 느끼지도 못했다. '나는 주류 감성과 맞지 않는다.' 유학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The Art of Painting' |
제임스 휘슬러, 'Symphony in Grey and Green The Ocean' |
그래도 나름의 수확은 있었다.
하메르스회는 페르메이르 특유의 정적인 실내화(室內畫)에 큰 감명을 느꼈다. 제임스 휘슬러(James Whistler·1834~1903)의 특기인 그리자이유(grisaille·회색 조의 색채만으로 명암과 농담을 표현하는 기법)에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돌아온 하메르스회는 더는 무엇도 할 수 없을 만큼 기진맥진했다.
모든 기운을 다 쏟은 그는 쉬지 않고선 배길 수 없기에 쉬고, 또 쉬었다. 생애 가장 긴 휴식을 이어갔다. 그 또한 처음에는 움찔대는 조바심에 괴로워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집 곳곳에서 움트는 적막 속 평화를 발견한 것이었다. 하메르스회는 그때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 화가인지를 직감했다.
하메르스회가 가장 자주 모델로 삼은 이는 다섯 살 연하의 아내 이다였다.
하메르스회가 1891년에 결혼한 이다는 차분하고 가정적인 성격의 여인이었다. 집에 자의적으로 오래 머물기 시작한 하메르스회는 때로는 그녀를 졸졸 따라다녔다. "여보. 이제 좀…." 그 이다마저 질린 표정을 지을 만큼 지켜보는 데 몰두한 적도 있었다. 하메르스회는 이 과정에서 책을 읽는 이다, 그릇을 닦는 이다, 창문을 보는 이다 등 홀로 있는 이다의 여러 모습을 화폭에 옮겨담았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편지를 읽는 여인' |
빌헬름 하메르스회, '편지를 읽는 이다' |
"이걸 들고 있어보겠소?" 하메르스회는 이다에게 책이나 뜨개질 도구 같은 걸 준 뒤 원하는 자세를 말하기도 했다. 그러면 이다는 또 한 번 어깨를 으쓱한 뒤 이를 받아들고선 캔버스 앞에 가만히 있는 식이었다. 때로는 옛 거장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었다. 가령 하메르스회의 〈편지를 읽는 이다〉는 사실 페르메이르의 〈편지를 읽는 여인〉을 참고해 그린 것이었다.
빌헬름 하메르스회, ' Ida in an interior' |
그렇다면 하메르스회는 왜 이다의 옆 내지 뒷모습에 주목한 것일까.
인간은 오롯이 자기 옆 혹은 뒷모습을 볼 수 없다. 그렇기에 꾸민다고 해도 어려움이 있고, 연출하려 한들 한계가 분명하다.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rnier·1924~2016)도 산문집 〈뒷모습〉에서 "사람은 얼굴을 꾸며 표정을 짓고 (…) 몸짓과 발걸음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 그렇다면 이면은? 뒤쪽은? 등 뒤는?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메르스회 또한 어떤 가장도 없는 완연한 휴식의 틈을 표현하기 위해 이러한 구도를 강조했을 수 있다. 일부러 눈코입을 뚜렷이 볼 수 없도록 해 감상자의 몰입도를 높일 의도가 있을지도 모른다.
빌헬름 하메르스회, 'Interior of Courtyard, Strandgade 30' |
하메르스회는 1898년, 코펜하겐 스트랑게제 30번지에 있는 집을 얻었다. 그는 그곳에서 11년을 살았다. 이어 1913년부터 3년간은 스트랑게제 25번지에 있는 집에서 생활했다. 그의 그림 속 배경 대부분은 이곳들이었다.
빌헬름 하메르스회, '이젤이 있는 인테리어' |
하메르스회의 후기 대표작은 〈이젤이 있는 인테리어〉다.
이 그림에는 하메르스회가 주야장천 그려넣은 이다조차 보이질 않는다. 열린 문과 그 틈으로 볼 수 있는 책상, 홀로 선 이젤과 벽 한편에 걸려있는 액자뿐이다. 창문을 타고 내리쬐는 햇빛, 그 안에서 춤을 추고 있을 먼지 말곤 모든 게 멈춰있을 듯하다. 이곳은 오롯이 감상자를 위한 휴식 장소이지 않을까. 하메르스회가 마법으로 초대하는 공간인 듯, 눈을 감은 후 다시 뜨면 어느새 햇살 아래 착지해있을 듯한 마음이다. 그렇게 보고, 또 보다보면 가슴 한 곳에 응어리진 무언가가 뭉근해지는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빌헬름 하메르스회, 'Sunshine in the Drawingroom' |
한편 그런 하메르스회가 그의 집만큼 각별하게 여긴 곳이 딱 하나 더 있었다.
그곳은 영국 런던이었다. 하메르스회는 축축한 안개와 자욱한 석탄 연기가 자아내는 런던 특유의 괴괴함이 좋았다. 그가 굳이 템스강까지 건너와 희끄무레한 풍경을 감상했던 까닭이었다.
빌헬름 하메르스회, 'View from the British Museum' |
하메르스회가 런던을 좋아한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의 우상, 휘슬러의 존재였다. 언젠가 하메르스회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게 용기를 낸 적도 있었다. 휘슬러를 직접 만나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그는 런던 안 휘슬러의 작업실을 찾았지만, 이 까칠한 대가는 좀처럼 문을 열어주질 않았다. "또 바쁘다고만 하고 관심을 두질 않네 그려. 내가 대신 사과드리겠소." 둘의 만남을 주선하겠다고 나선 미술품 수집가만 하메르스회에게 거듭 고개를 숙였다. 이 일에 상처받은 하메르스회는 다시는 휘슬러와의 만남을 시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평생 존경했던 인물에게 바람 맞은 이 사연을 알면, 그의 그림 또한 한층 더 애틋하게 보이기도 한다.
빌헬름 하메르스회, 'Interior' |
그런가 하면, 반대로 누군가 하메르스회를 찾아온 적도 있었다. 그가 릴케였다.
릴케는 한 전시회에서 하메르스회가 이다와 방 안 풍경을 담은 그림을 마주했다. 단숨에 그 매력에 빠져든 릴케는 하메르스회에 대한 글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하메르스회를 만나기 위해 코펜하겐까지 왔다. 하지만 이 신비로운 화가는 그의 눈을 좀처럼 마주치지 못했다. "릴케 선생. 나는 내 그림에 대해 길게 설명할 수 있는 말주변이 없소. 미안하오…." 한참 입을 꾹 닫고 있다가 꺼낸 말은 이런 것이었다. 릴케는 그런 하메르스회를 이해하고, 계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이야기는 또 이것대로 그의 작품 속 서글픔을 더해준다.
빌헬름 하메르스회, 'Interior with the artist's wife Ida in their home at Strandgade 30' |
하메르스회는 "싱거운 일상을 그린다"는 평이 지겹도록 따라왔다. 그는 이 족쇄 탓에 제대로 붓을 쥐고도 오랜 세월 무명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그런 그는 1910년대가 돼서야 빛을 볼 수 있었다. 온 세상이 제1차 세계대전의 불안감과 산업혁명의 후유증으로 지쳐갈 때였다. 모두가 뒤늦게 휴식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시기였다. 이쯤 하메르스회는 왕립미술학교 임원으로 뽑혔다. 로마 국제 미술 전시회에서 1등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하메르스회는 1914년 이후 거의 붓을 쥐지 않았다. 그 해 어머니가 죽어 상실감이 컸고, 그의 몸과 감각 또한 예전 같지 않았던 탓이었다. 하메르스회는 1916년 쉰한 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인후암이었다. 주인 잃은 작품들도 조용하게 잊혔다.
빌헬름 하메르스회, 'the Tall Windows' |
하메르스회의 그림은 한 세기가 흐른 2001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연 전시로 되살아날 수 있었다.
그의 담담한 그림은 21세기를 사는 많은 이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바쁜 삶 속 잊고 있던 내 방안 휴식의 세계로 빠져들 수 있도록 이끌었다. "나는 하메르스회의 그림 속에서 깊은 내면의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릴케가 쓴 글처럼, 이들은 까맣게 잊고 있던 사색 속 평화를 체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메르스회는 미술사 통틀어 가장 존재감 큰 위로 내지 격려의 화가 중 한 명으로 재차 각광받게 됐다.
빌헬름 하메르스회, 'Sitting Room. Study in Sunlight' |
〈참고 자료〉
Hammershoi, Jean-Loup Champion, Frank Claustrat, Rizzoli International Publications
501 위대한 화가, 스티븐 파딩, 마로니에북스
스칸디나비아 예술사, 이희숙, 이담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