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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초는 글로벌 금융위기, 가공할 만한 전염병 확산, 인공지능(AI)이 촉발하는 기술혁명 등이 뒤섞여 혼돈과 희망이 중첩돼 있다. 글로벌 금융 위기로 세계 경제가 충격에 휩싸였던 2008년 9월 미국 뉴욕의 금융중심지 월스트리트의 대표 조형물인 황소 앞에서 미 정부의 금융사 매입에 반대하는 시민단체 회원들이 거리에 누워 있다.(사진 왼쪽) 코로나19가 확산하던 2020년 12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롱비치에 있는 재향군인 기념 경기장에 마련된 검사소 앞에 감염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차량이 길게 늘어서 있다. [합성 이미지] |
리더십과 국제협력, ‘공동번영’의 길
미래의 역사학자들은 21세기 초를 어떻게 평가할까. 세계 경제가 연이은 대규모 쇼크에 시달렸다. 2000년대 초의 호황기에 선진국은 연간 국내총생산(GDP) 약 3%, 중하위 소득국은 8% 이상을 기록했으나, 2008년 금융위기가 불어닥쳤다.
2010년대의 침체기를 지나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대유행)이 세계를 강타했고, 이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수년래 가장 심각한 무력 충돌이 발생했으며, 현재는 중동 지역이 암담한 갈등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 밖에도 여러 일촉즉발의 잠재적인 지정학적 위기가 산적해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앞으로 몇 년간 세계가 더디지만 꾸준하게 성장하리라고 예측했지만, 각종 거대한 불확실성이 존재하고 있으며, 지금보다 심각한 경제적·정치적 혼란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중국의 부동산 위기, 변덕스러운 상품 가격, 내릴 줄 모르는 물가, 재정 여력의 부재 등 IMF의 최신 세계경제전망에 열거된 잠재적 하방 위험들은 실로 위압적이다. 이 보고서는 최근의 중동 사태와 후티 반군의 홍해 선박 공격이 있기 전에 작성된 것이다. 오는 11월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 등 선거에 따른 불확실성이 더해지면 2024년 경제 전망은 더 어두워진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치게 비관적인 견해일 수도 있다. 지난 20년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비범한 혁신의 시대였다고도 볼 수 있다. 스티브 잡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맥월드(MacWorld)에서 마치 연극처럼 아이폰을 선보인 것이 불과 2007년 1월이다. 스마트폰 혁명, 강력한 휴대용 기기들의 결합, 무선통신 그리고 앱 디자인은 세계인의 삶과 일을 바꿔 놓았다. 미국, 영국 같은 나라에서 사람들은 뉴스, 여행, 금융, 연예, 메시지, 심지어 전화를 목적으로 하루에 몇 시간씩 스마트폰을 사용한다. 기술은 플랫폼 사업 모델을 탄생시켰고, 이 모델은 일부 혁신적인 기업들의 손에서 새로운 시장을 조성하는 데 활용됐다.
독일 하노버에서 지난해 4월 열린 산업무역박람회를 통해 인공지능으로 제어할 수 있는 로봇이 공개되고 있다. |
인상적인 혁신이 디지털 기술 영역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당장 코로나 백신의 초고속 개발, 미래의 발견을 위한 mRNA 플랫폼 등 각종 생물의학 사례를 떠올릴 수 있다. 그 밖에 장기 치료를 위한 실험실 배양 세포, 로봇 수술과 원격 수술의 발달, 그리고 가장 최신 사례로서 기존 약물이 지닌 항생제 저항성 문제를 해결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항생제들을 들 수 있다.
딥마인드(DeepMind)가 개발한 알파폴드 단백질 구조 데이터베이스(AlphaFold Protein Structure Database)는 디지털과 의료 모두에 걸쳐 있다. 이 데이터베이스는 놀랍게도 연구자들에게 수년씩 걸리는 더딘 단백질 구조 파악 과정을 단축시켜줘 약물 발견 과정을 가속한다. 과학 매체들은 이를 두고 약물 개발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에 대한 해결책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내일의 역사학자들은 기술적 진보를 이룬 사건들과 정치적 불안의 확산이 시기상으로 맞물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쇄술이 보급된 16세기는 유럽 전체에 갈등이 만연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산업혁명의 결과, 새롭고 가격이 저렴해진 소비재를 누릴 수 있는 중산층이 번성했음에도 이 시기는 대규모의 사회적 격변을 겪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라디오와 TV에서부터 내연기관과 실내배관의 보급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기술적 진보가 이뤄졌다.
규모가 가장 큰 와해성(disruptive) 기술은 경제학자들이 ‘범용 기술’이라 부르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결국 경제와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범용 기술은 어디에나 사용되고, 그 과정에서 일과 삶의 기존 패턴을 변화시킨다. 디지털 기술도 분명히 이 정의에 해당하며, 인공지능(AI)의 최근 발전상은 와해를 지속시킬 것이 분명해 보인다. 결과적으로는 일상생활이 놀랍도록 진보하게 되지만, 항상 승자와 패자가 있게 마련이다. 이 경쟁이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건전하지만, 발전의 편익이 부유한 소수에게만 집중된다고 느껴지면, 정치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국가의 경제적 이익을 위태롭게 한다고 생각되면, 지정학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 두 리스크는 불가피해 보인다. 기술 호황은 21세기 초의 설익은 이데올로기와 결합해 생계비 위기에 허덕이는 이웃들의 고민이나 경험과 유리된 세계적 슈퍼 리치(super-rich) 층을 낳았다. 인상적인 기술적 진보가 일반인에게 도움이 된다는 징후는 아직 찾기 힘들다. 설령 있다 해도 직장에서 끊임없는 감시 하에 놓인 사람들, 혹은 새로운 형태의 AI에게 생계를 위협받는 프리랜서나 사무직 근로자들에게 그것은 새로운 착취 방법으로 비칠 뿐이다.
지정학에 있어서는 기술이 새로운 군비경쟁의 촉매제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미국과 중국은 AI, 드론 기술, 심지어는 유전 공학에서까지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 국제적인 과학 협력과 투자 흐름 모두 과학적 국수주의 탓에 위험에 처해 있다. 과거 역사적 사건들을 살펴보면, 너무 명백한 기후변화나 극한 기상 현상은 차치한다 하더라도 2024년의 전망, 혹은 또 다른 팬데믹의 가능성에 대해 낙관하기 어렵다. 세계적 경제침체를 초래하는 국제적 연결고리의 차단이 정치적 갈등 때문에 다시 가능성 있는 카드가 될 것인가.
그것이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심한 오산일 것이다. 경제가 일반인에게 유익하게 작용하지 않고 있다는 보편적 인식은 불확실한 정치 환경을 조장했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이에게 도움이 되는 혁신을 구현하기 위해 정부와 민간 기업들이 머리를 맞댈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규제(과거 모든 기술 혁신 때와 마찬가지로)와 국제적 협력이 필요하다. 현재와 같이 양극화되고 불확실한 시대에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리더십과 협력이 성공해 공동의 번영을 이룩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이번 새해는 권력과 영향력을 가진 자들이 경제적, 정치적 사건들을 형성해 나가는 중요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다이앤 코일 영국 케임브리지대 베넷 공공정책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