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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부터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핵 보유국인 러시아의 전쟁이기도 하다. 러시아는 핵무기를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핵무기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기에 전쟁 전 기간에 걸쳐 핵 그늘이 드리워졌다.
2022년 2월 전쟁 시작과 함께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핵무기 대기 태세를 격상시켰다. 4월에는 러시아의 최신형 ICBM이 시험 발사됐다. 이어 2023년 2월에는 미국과의 핵 군비 통제 논의 중지를 선언했고, 6월에 러시아 전술핵무기가 냉전 이후 최초로 해외에 배치됐다.
러시아의 핵무기 존재감 과시방법의 대부분은 주요 당국자의 발언에 의한 수사적 위협이라는 특징을 보였다. 러시아의 수사적 핵 위협은 전쟁 발발 전부터 시작됐는데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2022년 1월에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핵무기 사용 권리’를 언급했다. 2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군의 침공을 발표하면서 “러시아는 핵 보유국이며, 방해하는 국가는 역사상 유례 없는 결과에 직면할 것”이라며 핵 위협을 암시했다.
러시아의 ‘수사적 핵 위협’은 전쟁의 성격이 동부와 남부 전선의 영토쟁탈전으로 변화되기 시작된 4월에 특히 고조됐다.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은 4월 25일 ‘핵 전쟁 가능성’을 언급했다. 푸틴 대통령은 27일 ‘모든 종류 수단의 사용’을 선언했다. 당시 특기할 만한 현상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동맹의 의무 또는 확장 억제 공약 의무가 전혀 없는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도 수사적 핵 위협에 비슷한 방식으로 대응했다는 것이다.
2022년 2월 장이브 르드리앙 프랑스 외교장관은 “NATO도 핵무기를 보유한다”고 말했다. 미국은 외교 채널을 통해 러시아에 전술핵무기 사용을 금지하라는 경고를 전달했다. 그해 4월에는 제이크 설리번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이 “러시아의 핵 위협을 좌시하지 않겠다”고 강도높은 표현을 내놨다. 5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어떤 핵무기 사용도 용납할 수 없고, 심각한 결과가 뒤따를 것”이라며 경고했다.
러시아의 수사적 핵 위협이 완화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5월 29일 안드레이 켈린 영국 주재 러시아대사는 “제한적인 재래식 작전에서 핵 사용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6월 17일에는 푸틴 대통령이 핵무기를 공격용으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게 된다. 러시아의 수사적 핵 위협 수위는 큰 폭으로 출렁인 양상을 보였다.
그 배경에는 서방의 맞대응 전략 ‘팃포탯(tit-for-tat)’이 있었다. 러시아와 서방의 팃포탯은 이어졌다. 9월 30일에 우크라이나 점령지를 러시아 연방에 편입시키면서 푸틴과 메드베데프는 새로 합병된 영토를 방위하기 위해 핵무기도 사용할 수 있음을 여러 차례 암시했다. 그러자 설리번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이 “핵 사용은 러시아에 파멸적 결과”라고 발언했고, 10월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 3개국이 러시아의 핵무기 사용 시 서방의 재래식 군사 보복을 결의하는 합동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런 가운데 러시아는 수사적 핵 위협을 완화시키기 시작했다. 10월 4일 드미트리 페스코프 공보수석이 “서방은 러시아의 핵무기 사용계획에 대해 잘못된 편견을 갖고 있다”고 발언했다. 러시아의 수사적 핵 위협 수위는 2023년 들어서도 출렁이는 모습을 보였다. 2월 서방 공격무기의 우크라이나 지원 결정 발표 당시와 6월 우크라이나군의 반격 시작과 함께 러시아의 수사적 핵 위협도 고조됐다가 서방의 팃포탯 방식 발언에 이어 수위가 완화되기를 반복했다.
사실 전쟁 전 기간에 걸쳐 러시아의 핵 위협에는 시간적 제약이나 구체적 요구가 동반되지는 않았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나 1973년 4차 중동전쟁 당시 미국이 소련의 정치적 양보를 강요하기 위해 국가 핵경보 태세를 발령했던 정도의 긴박감이 넘치는 위협은 아닌 것이다.
그와 달리 러시아 핵 위협의 특성은 재래식 전쟁 수행과 결합됐다는 것에 있다. 일종의 ‘핵 재래식 결합(CNI·conventional nuclear integration)’인 것이다. 러시아는 CNI에서 핵무기를 주로 수사적 위협 도구로 활용했고, 서방은 팃포탯 방식으로 맞선 것이다.
이와 같은 CNI 상황은 한반도에서도 북한이 핵 그늘에서의 재래식 군사 도발 형태로 재연시킬 수도 있다. 이때 러시아와 달리 재래식 군사력이 열세한 북한의 CNI는 수사적 핵 위협으로 한정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와 달리 확장 억제 공약이 작동하는 한반도에서 한미 동맹의 CNI 역시 팃포탯을 넘어서 다양한 선택지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미 양국은 ‘워싱턴 선언’ 이후 미국의 핵전력을 한국의 재래식 전력이 지원하는 공동 기획과 연습을 추진하고 있다. 동맹의 CNI는 이미 시작된 셈이기도 하다.
이번 계기에 북한식 핵 그늘에서의 재래식 군사 도발 상황에 단호히 대응하면서도 핵 억제를 달성할 수 있는 동맹의 CNI 대안들을 미리 강구해 놓아야 할 것이다.
김광진 숙명여대 석좌교수(전 공군대학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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