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초, 성 삼위일체(일부 확대), 1424~1427 |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1428년 어느 날,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바로 본관으로 가지 않는데요. 성당 왼쪽 벽면에 큰 관심을 둡니다. 벽을 파내 새 조형물을 꾸몄다는 소식을 들은 겁니다. 그런데…. "응? 이게 뭐야?" 이를 향해 맨 앞에서 뛰다시피 걷던 한 사람이 파낸 공간 안쪽으로 쑥 들어가려다 말고 급히 멈춥니다. 목소리에 당혹감이 묻어납니다. "벽을 파낸 게 아니에요. 벽은 멀쩡해요. 그림이 그려져 있는 거예요!" 그저 벽화라고…? 사람들이 웅성댑니다.
"에이, 여기까지 와서 장난을 치고 그래."
뒷줄에 있던 또 다른 사람이 호탕하게 웃으며 나옵니다. "이게 그림이야? 당신들, 살면서 이런 그림 본 적 있어?"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젓습니다. 그는 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누구를 바보 취급해…. 중얼대던 그는 뒤에서 들려오는 "위험해요!"란 말을 차마 듣지 못한 채 벽화에 꽝 부딪히고 맙니다. "뭐…. 뭐야. 벽이야? 진짜 그림이란 말이야?" 보기 좋게 나자빠진 그의 눈이 번쩍 뜨입니다. 우스꽝스럽게 넘어진 그 모습에 현장은 웃음바다가 됩니다.
이날 성당을 찾은 사람들은 생애 최초로 '원근법'을 봤습니다.
평면적 그림만 봐 온 이들은 처음으로 원근법이 만든 짜릿한 공간감을 만끽했습니다. 서구 미술의 새로운 500년을 지배할 이 기법을 처음 그림으로 선보인 화가 이름은 마사초. 훗날 원근법의 선구자로 불리게 될 인물입니다.
원근법의 교본으로 남을 이 그림의 제목은 '성 삼위일체'입니다. 화가와 작품 모두 다소 생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까다로운 르네상스 3대 거장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마저 마사초에게만은 "한 수 배웠습니다"라고 할 정도로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화가입니다.
마사초, 성 삼위일체, 1424~1427 |
성부(聖父)·성자(聖子)·성령(聖靈), 성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장면이 담긴 그림입니다.
삼위일체란 이 세 존재가 모두 하나의 하느님이라는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뜻합니다. 종교 회화에서 단골 소재로 다뤄지는 겁니다. 천장 바로 아래 성부로 칭해지는 하느님이 있지요. 십자가 못 박힌 성자 예수의 두 팔을 받쳐 들고 있습니다. 하느님 얼굴 바로 아래 예수의 머리 쪽으로 날아가는 흰 비둘기가 그려졌습니다. 이는 성령의 상징입니다.
마사초, 성 삼위일체(일부 확대), 1424~1427 |
이 작품이 왜 '벽을 파내 만든 조형물'이라는 오해받았는지 짐작이 갈까요.
정답부터 말하자면 원근법 덕입니다. 우리 눈에서 가까이 보이는 건 크게 그리고, 멀리 보이는 물체는 작게 표현하는 그 미술 기법 맞습니다. 유심히 보면요. 그림 안에 4단계의 거리 차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앞쪽부터 ①중년 남녀가 손을 모은 채 있는 공간 ②성모 마리아와 사도 요한이 있는 공간 ③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공간 ④가장 높은 단 위에 서 있는 하느님의 공간입니다. 분홍빛 무지개 모양 아치부터 격자무늬 반원형 천장을 따라 직선을 그어볼까요. 이 선들은 약속한 듯 하나의 점으로 모입니다. 십자가 밑동입니다. 이를 소실점(消失點·평행한 두 선이 멀리 가서 만나는 점)이라고 합니다.
마사초, 성 삼위일체(소실점 표시), 1424~1427 |
선과 소실점을 놓고 다시 보면요.
그림 속 사람과 사물은 소실점을 향해 비례적으로 작아집니다. 뻗어간 선의 길이가 길수록, 그 선의 출발점과 십자가 밑동 사이 깊이감이 더 느껴집니다. 이런 수학적 계산이 선 원근법의 핵심입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이 작품을 평면화가 아닌 입체 조형물로 착각한 겁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마사초는 원근법의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몇 가지 설계를 했는데요.
먼저, 그는 황금비율을 갖춘 소실점을 찍어내기 위해 못과 끈을 활용했습니다. 소실점의 자리로 점 찍어둔 곳에 못을 살짝 박습니다. 그런 다음 못 끝부분에 끈을 묶습니다. 그 끈을 어느 방향이든 끝까지 쭉 잡아당기기만 하면, 소실점과 한 치 오차 없이 이어지는 직선을 만들 수 있게 한 겁니다.
마사초, 성 삼위일체(일부 확대), 1424~1427 |
지금도 벽화를 가까이서 보면요.
이 끈을 따라 그린 듯한 스케치 흔적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마사초는 벽화 감상자의 눈높이도 계산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성인 남성의 평균 키는 162cm 정도였습니다. 마사초는 이들의 눈높이를 153cm쯤으로 봤습니다. 딱 그 지점쯤 십자가 밑동이 그려졌습니다. 눈높이 바로 위를 올려다보면서 깊이감을 느껴보라는 것처럼요.
아치와 기둥도 모두 마사초의 장치였습니다. 이는 당시 피렌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디자인이었습니다. 그림에 현장감을 더하려고 눈에 익은 사물들을 가져온 겁니다.
마사초는 그림에 원근법을 시도한 첫 화가로 칭해집니다.
"원근법, 우리가 초등학생 때 배우는 거 아니야? 그게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호들갑이야?"라는 분도 있겠습니다. 마사초에 대해 꼭 알아야 할 게 있는데요. 이 사람이 15세기 화가라는 겁니다. 그 시절 화가들은 '신의 눈'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개인의 눈'은 벗어두고서요. 전지전능한 신의 시선에선 모든 게 평평했습니다. 대상 사이 거리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본질적인 의미만 봅니다. "중요한 사람이야? 응, 그러면 더 크게…. 별로 안 중요한 사람이야? 응, 그러면 더 작게"라는 말이 회화에서 교과서처럼 통용되던 시대였습니다.
치마부에, 엄숙한 성모 마에스타 |
당시 그림에서 가장 크게 그려지는 이는 신과 성인(聖人)들이었지요.
그 다음은 왕과 귀족이고, 가장 작게 그려지면 십중팔구 평민이었습니다. 마치 아직 자아가 성립되지 않은 아이들이 부모님 모습만 크게 그리는 일과 비슷했지요. 13세기 이탈리아에서 이름을 떨친 대가 치마부에의 작품 중 하나인 '엄숙한 성모 마에스타'가 대표적입니다.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가 그림 한가운데 큼직하게 그려졌습니다. 바로 옆 천사들은 아주 작게 묘사됐습니다. 맨 앞 천사가 가장 크게, 맨 뒤 천사가 가장 작게 그려지지도 않았지요. 이런 그림이 당연한 시대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잘 그리면 거장, 대가로 박수갈채를 받는 세상이었습니다.
브루넬레스 (마사초, 테오필로스 아들의 부활 중 일부) |
마사초는 어쩌다 원근법을 알게 됐을까요.
브루넬레스키 이야기가 빠질 수 없습니다. 피렌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두오모)을 지은 천재 건축가입니다. 나이만 따지면 마사초의 삼촌 격입니다. 사실 마사초에 앞서 원근법을 익힌 이가 브루넬레스키였습니다. 중세의 손이 타지 않은 고대 로마의 건축물을 살펴보던 중 "유레카!"를 일깨우게 된 겁니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브루넬레스키의 돔. [위키백과] |
1420년 브루넬레스키가 두오모 광장에서 선보인 원근법 실험은 지금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글로 보기에는 약간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구나?" 정도만 이해해도 충분합니다. 당시 브루넬레스키는 산 조반니 세례당을 보고 섰습니다. 한 손에는 그림이 있습니다. 자신이 원근법 이론대로 그린 이 세례당의 그림이었습니다. 다른 한 손에는 거울을 든 채였습니다.
브루넬레스키는 먼저 그림으로 자기 얼굴을 가립니다.
거울을 든 손은 앞으로 뻗습니다. 그는 그림 아래쪽에 동그란 구멍을 뚫은 상태였습니다. 브루넬레스키가 보는 거울에는 당연히 이 그림이 비치고 있겠지요. 그는 이 구멍을 통해 ①거울 너머 세례당 실물 ②거울에 비친 세례당 그림을 함께 보게 됩니다.
브루넬레스키의 성 요한 세례당 원근법 시연 [BRUNELLESCHI and the Re-Discovery of Linear Perspective@maItaly] |
브루넬레스키는 손을 이리저리 뻗고 당기면서 거울의 위치를 조금씩 바꿔봅니다.
"찾았다!" 한참을 앞뒤로 거울을 움직이던 브루넬레스키가 탄성을 지릅니다. 거울 너머 정면에 있는 실제 세례당과 거울에 반사된 그림 속 세례당이 겹쳐 어떤 게 실물이고 어떤 게 그림인지 알아볼 수 없는 각도가 있었던 겁니다. 브루넬레스키의 실험을 체험한 사람들은 "마법을 부리는 건축가가 나타났다"며 화들짝 놀랐다고 하지요. 마사초는 그런 브루넬레스키와 교류하던 중 어깨 너머로 원근법의 원리를 배웁니다. 원근법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었다고 판단한 뒤 붓을 듭니다. 그렇게 건축용 과학적 방법론에서 멈출 뻔한 원근법을 회화 세계에 가져다 놓습니다.
마사초가 끌어들인 원근법은 "신의 시선은 그만! 인간 중심으로 세상을 보고, 인간 시선으로 그림을 그려보자!"는 기조의 르네상스를 일깨웁니다.
이후 원근법은 성 삼위일체에서 볼 수 있는 ①소실점 중심의 선(線) 원근법, 공기층에 따른 변화에 맞춰 ②색채 조절을 통해 구현하는 대기(공기) 원근법으로 갈라져 서양 미술 사조를 500여년간 지배합니다. (대기 원근법을 활용한 대표작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입니다.) 19세기 세잔과 피카소가 등장하기 전까지 깨뜨릴 수 없는 원칙으로 우뚝 섭니다.
왜 하필 마사초였을까.
이쯤에서 드는 궁금증입니다. 15세기 유럽의 금융·무역 중심지 피렌체에서는 수많은 재능 있는 화가들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요. 마사초가 '천재 중의 천재'였기 때문이라는 게 가장 설득력이 있는 말입니다. 마사초는 1401년 피렌체 근교의 산 지오반니 발다르노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16세부터 그림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쯤 피렌체로 이사를 한 게 계기였습니다.
마사초·파니칼레, Madonna and Child with St. Anne |
스승은 아직 중세 그림 기법에 안주하던 마솔리노 다 파니칼레였습니다.
마사초도 처음에는 다른 화가들과 다를 바 없이 중세 스타일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스승을 뛰어넘는 제자 대부분이 그렇듯, 마사초는 점점 더 그의 가르침만으론 성이 차지 않았습니다. 마사초는 스스로 정신적 지주를 '간택'합니다. 그가 바로 원근법의 산파(産婆)였던 브루넬레스키였습니다.
마사초(왼쪽 붉은 옷)·브루넬레스키(오른쪽 끝·마사초, 테오필로스 아들의 부활 중 일부) |
브랑카치 예배당에 그려진 벽화 '테오필로스 아들의 부활'을 보면 마사초의 실제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붉은 옷을 입고 관람자를 빤히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 옆에 브루넬레스키(오른쪽 끝)가 있습니다. 그만큼 마음으로 따랐다는 뜻입니다.
직업 화가로 활동한 기간은 고작 1422~1428년, 단 6년뿐입니다.
그동안 오직 그림밖에 모르는 외골수로 살았습니다. 몸도 제대로 씻지 않은 채 붓질을 한다고 해 '더러운 톰마소'라고 불렸습니다. 그림 말곤 세상살이에 서툴러 '어수룩한 톰'으로도 칭해졌습니다. 그런 마사초가 '성 삼위일체'를 들고 중세 미술의 심장을 찔렀던 그때가 고작 26살이었습니다. 그림을 겨우 6년 배운 한 청년의 손끝에서 영원할 것만 같던 제국이 무너진 겁니다.
운 좋게 시기를 잘 타고 난 게 아니냐는 말도 나올 법합니다.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동시대 피렌체 화가 우첼로의 그림을 보면 '마사초가 정말 특출났구나'라는 말을 실감케 됩니다. 그 당시 원근법이 얼마나 까다로운 기술이었는지 알 수 있거든요.
우첼로, 산 로마노의 전투 |
우첼로의 그림 '산 로마노 전투에서의 용병장 니콜로 다 톨렌티노'(산 로마노의 전투·1438~1440)를 보면요.
"약간 어색한데?"라는 느낌을 떨칠 수 없습니다. 함성과 비명, 말들의 울음소리로 가득 차야 할 전쟁터에 묘하게 정적이 흐르는 듯합니다. 바닥에 떨어진 창과 투구, 쓰러진 병사는 차분히 정돈된 모습입니다. 너무 대놓고 소실점을 향하고 있지요. 쓰러진 병사는 주변과 비교해서 크기도 잘 맞지 않습니다. 원근법의 효과를 살리려고 일부러 조정한 듯한데, 결과적으로는 보는 이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듭니다.
우첼로, Saint George and the Dragon |
물론 허허벌판을 배경으로 둔 전쟁터인 만큼 원근법을 자연스럽게 구사하기에는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보다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는 마사초가 '성 삼위일체'를 그린 후 10년이 더 지난 시기였습니다. 우첼로가 그저 그런 화가도 아니었습니다. 피렌체의 유명 가문이던 메디치가(家)로부터 대형 전쟁기념화 등 '큰 물건'을 다수 주문 받을 만큼 거물이었습니다. 게다가 우첼로는 "원근법아, 너 참 사랑스럽구나!"라는 다소 노골적인(?) 어록을 남길 만큼 원근법 연구에 몰두한 사람이었지요. 그런 우첼로마저 원근법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애를 먹은 겁니다.
마사초, 성 삼위일체(일부 확대), 1424~1427 |
사실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만 뜯어봐도 그의 탁월한 감각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사초는 이 그림을 그릴 때 원근법 말고도 다채로운 시도를 했는데요. 십자가 아래 왼쪽에 있는 성모 마리아가 검은 계통 옷을 입고 있지요. 눈은 관람객을 향해있는 듯한데, 손은 예수를 향하고 있습니다. "어딜 보니? 저길 봐!"라고 하는 느낌입니다. 그림이라면 당연히 진지하고 엄숙해야 할 시기에 틀을 깨고 농담을 건네는 듯합니다.
마사초, 성 삼위일체(일부 확대), 1424~1427 |
마사초, 성 삼위일체(일부 확대), 1424~1427 |
그 아래 두 사람은 마사초의 후원자 부부인 도미니코 렌지와 아내 산드라입니다.
한 칸 위에 있는 성모, 성자와 반대되는 색상의 옷으로 표현했습니다. 네 명은 대칭적 피라미드 구도 안에 있기도 합니다. 이 덕분에 입체감이 뛰어난 이 그림에서 균형감까지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시대 예수와 십자가 그림은 대부분 무덤이나 갈보리 언덕을 배경으로 그려졌습니다. 마사초는 그 틀까지 깼습니다. 고풍스러운 건축을 뒷배경으로 두면서 말이죠.
마사초, 성 삼위일체(일부 확대), 1424~1427 |
마사초는 그 뛰어난 센스로 르네상스의 발걸음도 부추겼습니다.
성 삼위일체 그림 속에는 "신이 아닌 인간이 중심돼야 한다!"의 '르네상스 정신'에 딱 맞는 문구가 있습니다. 이 그림 하단에는 해골이 덩그러니 놓여 있지요. 최초의 인간으로 칭해지는 아담이라는 해석이 우세합니다. 해골 묘비에는 라틴어의 경구 '지금 나는 원래 당신과 같았다. 당신도 언젠가 나처럼 될 것이다'가 쓰였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는 예수의 존재를 부각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의 화가 꿈나무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삶은 짧아. 무한하지 않아. 그런데도 언제까지 신 타령만 할래? 살아있을 때 너희 세계에 더 집중해"라는 말로 해석했습니다.
마사초(마사초, 테오필로스 아들의 부활 중 일부) |
마사초의 삶은 빛났지만, 그의 죽음은 허무했습니다.
마사초가 죽은 나이는 27살입니다. 휴양차 로마로 간 그는 그곳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약물 중독이야?", "무명 화가가 마사초의 천재성을 시기해서 독살했다던데?"라는 말이 퍼질 정도였습니다.
마사초, 낙원에서의 추방 |
마사초에게 영향을 받은 대표적 인물은 미켈란젤로입니다.
실제로 미켈란젤로는 마사초의 그림을 공부하고 모사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그릴 때도 마사초의 '추방당하는 아담과 이브' 등 작품을 참고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얼마나 마사초에게 심취했는지 "미켈란젤로는 모든 사람을 가르쳤다. 하지만 마사초에게서는 배웠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마사초, 성전세 |
마사초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처럼 반세기 이상 살았다면 서양 미술사는 어떻게든 달라졌을 겁니다.
마사초가 불꽃 같은 삶을 살고 떠났을 때 가장 애석해 한 이는 브루넬레스키였습니다. "그를 잃어버린 일은 비할 데 없는 큰 손실"이라며 통곡했습니다.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 3대 거장으로 거론되는 라파엘로의 묘비문을 아실까요. '여기는 생전에 어머니 자연이 그에게 정복될까 두려워 떨게 만든 라파엘로의 무덤이다. 이제 그가 죽었으니 그와 함께 자연 또한 죽을까 두려워하노라.' 이 글을 쓴 이가 마사초의 묘비문을 썼다면 이렇게 쓰지 않았을까요. '이제 마사초가 죽었으니 그의 손에서 겨우 살아난 원근법 또한 다시 죽을까 두려워하노라.'
〈후암동 미술관 읽는 순서(연재 중)〉
1)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2)뻥 아냐, 600년전인데 이 정도 ‘입체 그림’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사초 편] - 원근법 선구자(2022. 8. 27)
3)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4)‘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5)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6)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7)“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8)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9)“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10)‘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11)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12)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근대 회화 선구자(2022. 7.9.)
13)화끈한 키스, ‘이 여성’ 사르르 녹아내리다[후암동 미술관-구스타프 클림트 편] - 빈 분리파 선구자 (2022. 8. 13.)
14)나체 여인, 어쩌다 사자 득실대는 정글 한복판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루소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 7. 30.)
15)헐크색 피부 갖게 된 ‘이 여성’…이 놈의 ‘남편’ 때문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야수주의 선구자 (2022. 7. 16.)
16)잘생긴 법학 교수님, ‘이것’ 그렸더니 미술계 '발칵'[후암동 미술관-바실리 칸딘스키 편] - 추상회화 선구자 (2022.7. 23.)
17)“이건 나도 그리겠다!” 1순위 그림, 그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몬드리안 편] - 추상회화 선구자⑵ (2022. 8. 6.)
18)권총도 채찍도 버텼는데, ‘이 남자’ 행동에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편] - 행위예술 대모 (2022. 8. 20.)
19)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2022.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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