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고민 상담가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수전 퀼리엄은 최근 학술지 ‘가족계획과 생식건강’(the Journal of Family Planning and Reproductive Health Care)에 이 같은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퀼리엄은 “내가 상담하는 여성들의 상당수가 이러한 로맨스 소설에 영향을 받고 있다”면서 “(로맨스 소설에서) 여성은 희생하고 남성의 말에 모든 것을 거는 약한 존재로 자주 묘사되곤 하는데 이는 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퀼리엄은 “여성의 권리가 고양된 요즘의 문화에서도 로맨스 소설이 이토록 깊은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면서 일부 선진국에서는 로맨스 소설이 전체 소설 판매량의 절반을 차지하기도 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미국에서 한해 팔리는 로맨스 소설의 매출액은 10억달러에 육박한다. 로맨스 소설의 대명사가 된 출판사 할리퀸의 경우 전 세계에서 1초에 4권씩 책을 팔고 있다.
특히 퀼리엄은 “여주인공이 거의 폭행에 가까운 육체적 관계를 맺고도 남성이 자신을 ‘정복하는’ 것에 대해 좋아하는 것처럼 잘못 그려진다”고 지적하면서 이는 현실에서 건강한 관계상을 해친다고 강조했다. 합의되지 않은 성관계가 로맨틱 한 것처럼 그려지는 것이나 여주인공이 남성들의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언행을 겪은 후 성적인 만족에 눈을 뜨게 된다는 다분히 성차별적이고 폭력적인 내용이 실생활에서 건강한 관계에 악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또한 로맨스 소설은 피임률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퀼리엄은 지적했다. 그는 “(소설 속에서) 말 위에 올라탄 건장한 남성은 거의 콘돔을 사용하지 않는데 이는 독자들에 위험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면서 최근 한 설문조사에서 로맨스 소설 독자들이 콘돔 사용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예를 증거로 들었다. 퀼리엄은 로맨스 소설에서 콘돔 사용을 언급하고 있는 빈도는 10권 중 1권에 지나지 않는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이밖에 근육질의 남성이 연약한 여성을 안고 있는 삽화나 멀티플 오르가즘, 손쉬운 임신 등이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이성 및 부부관계에 대한 고민상담 건으로만 한 해 2만5000여통의 편지를 받는다는 퀼리엄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친절하고 지혜로운 조언은 그들에게 책을 내려놓고 현실을 직시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유지현 기자/prodigy@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