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바리톤 사무엘윤 [예술의전당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나는 어디에서나 이방인이었다.” (슈베르트의 '방랑자 환상곡 C장조 D.760 1악장' 중)
‘바이로이트의 영웅’으로 불렸다. 동양인으로는 이례적으로 2012년 바이로이트 바그너 페스티벌 개막작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주역으로 서게 되면서다. 독일 주정부가 수여하는 독일어권 최고 영예인 ‘궁정가수’ 칭호도 받았다. 오랜 시간 ‘오페라 본토’에서 활동하며 세계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는 스스로를 ‘이방인’이라고 칭했다. 한국 출신의 세계적인 베이스바리톤 사무엘 윤이다.
“28년간 외국에서 지내다 보니 전 한 번도 한국인으로 산 적이 없어요. 그러면서도 그곳에선 늘 ‘방랑자’였고, ‘이방인’이었죠. 나의 고향이 어디인지 모를 정도로 긴 시간을 거치다 한국에 돌아온 지금, 지나온 저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사무엘 윤은 예술의전당이 올해 선보이고 있는 대형 프로젝트인 ‘보컬 마스터 시리즈’의 마지막 주자다. 앞서 홍혜경, 연광철이 이 시리즈를 통해 관객과 만났다. 대미를 장식할 무대는 ‘방랑자, 영웅의 여정’(11월16일·예술의전당)이라는 제목으로 관객과 만난다.
공연 준비에 한창인 사무엘 윤은 최근 예술의전당에서 기자들과 만나 “음악가로서 이방인이었던 저의 여정, 지금도 같은 환경에서 보내고 있는 후배 연주자들은 물론 해외에서 혹은 한국에서 이방인의 모습을 한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투영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제목부터 사무엘 윤의 색채가 강하게 묻어난다. 총 17개의 가곡을 ‘고독’, ‘슬픔’, ‘혼돈’, ‘절망과 죽음’, ‘구원과 소망’ 등의 다섯 개의 챕터로 구성한 이 음악극이다. 1인 오페라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국내 성악 무대에선 보기 힘든 독창적 프로그램이다.
사무엘 윤은 “일반적으로 시적 언어의 스펙트럼은 오페라가 더 크다고 생각하지만, 가곡이 가진 깊이와 넓이가 (오페라 못지 않게) 상당하다”라며 “다양한 가곡을 통해 더 풍성한 색의 스토리텔링을 담을 수 있으리라 봤다”고 말했다.
극은 무겁고 어둡다. 철저한 이방인이 된 무대 위 사무엘 윤은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있다. 고독한 영혼(슈베르트 ‘방랑자 환상곡’)의 슬픔(슈만 ‘시인의 사랑’, 클라라 슈만 ‘6개의 가곡’)과 혼란(퍼셀 오페라 ‘아서 왕’)이 파도처럼 밀려와 절망과 죽음(슈베르트 ‘죽음과 소녀’)으로 이끌어도, 종국엔 구원(바그너 ‘베젠동크 가곡’)받으리라는 소망을 품는다. 그는 “인간이 갖는 고뇌들이 결국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과정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오랜 외국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한국에서의 활동이 그에겐 ’구원‘이라고 했다. 공연에선 클라라 슈만의 곡을 ‘남자 버전’으로 바꾸고 대사에도 손을 본 것 역시 관전 포인트다.
비주얼 디렉터 박귀섭, 사무엘윤, 아벨콰르텟 윤은솔(왼쪽부터) [예술의전당 제공] |
음악극을 더 드라마틱하게 만드는 것은 무대 미학이다. 이번 작품에서 사무엘 윤은 비주얼 아티스트 박귀섭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바키(BAKI)라는 예명으로 더 잘 알려진 그는 공연예술에서 보여지는 모든 것을 관장, 명실상부 업계 원톱 비주얼 디렉터다. 이번 무대에선 사무엘윤과 공동 연출을 맡았다.
박귀섭 연출가는 “이방인이라는 키워드가 재미있었다. 해외에서 활동한 적은 없지만 나 역시 활동 영역의 변화로 인해 각 분야에서 이방인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고 했다. 그는 국립발레단 출신의 무용수에서 공연계 대표 사진작가로, 분야를 넘나들어 뮤직비디오와 드라마 타이틀 영상(넷플릭스 ‘스위트롬’)까지 작업했다. 박 연출가는 “무대를 24시간이라는 하루의 개념으로 설정해 각각의 시간대를 빛의 색감으로 표현하고자 했다”며 “여기에 전체적으로 흑백 톤의 무성영화를 보는 것처럼 콘셉트를 잡았고, 의자와 같은 상징적 오브제와 세 명의 무용수를 통해 몸짓으로도 스토리텔링을 더했다”고 말했다.
사무엘 윤과 호흡을 맞출 연주는 피아니스트 박종화와 아벨 콰르텟이 맡았다. 사무엘 윤은 “콰르텟과 함께 하고 싶어 수소문을 많이 했는데 10명 중 8명은 아벨 콰르텟을 언급했다”며 “아벨 콰르텟의 연주를 들으며 독특하고 창조적 에너지의 아벨 콰르텟 연주를 듣고 우리가 같은 결이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아벨 콰르텟의 바이올리니스트 윤은솔은 “(사무엘 윤) 선생님이 오케스트라가 아닌 콰르텟을 선택한 것은 성악과 음악 딱 붙어 가길 원했기 때문이라고 말씀주셨다”며 “이번 무대에선 기악과 성악이 하나처럼 어우러지는 데에 방향성을 뒀다”고 했다.
세계 주요 극장에서 주역으로 활동하던 사무엘 윤은 2022년 3월 서울대 성악과 교수로 임용, 한국에서 후학 양성에 한창이다. 현재 그에게 수업을 받는 학생은 무려 28명. 사무엘 윤의 가장 큰 바람이자 목표는 “다음 세대를 위한 더 많은 무대와 기회”를 만드는 것이다. 다양한 장르와 분야가 섞인 종합예술에 버금가는 이번 공연과 같은 새로운 시도가 미래 세대 음악가들을 위한 또 하나의 발판이 될 것이라는 확신도 있다. 그가 우리말로 된 가곡들로 새로운 종합예술극의 기획을 꿈꾸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지금 우리 음악계는 소수만 주목받고 무대에 설 수 있는 환경이에요. 전업 음악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죠. 그렇기에 새로운 무대를 통해 더 많은 기회를 만들어줘야 해요. 새로운 형태의 무대가 생겨나면 그만큼 음악가들에게 더 많은 레퍼토리와 무대 기회가 생겨날 거라 봐요. 그게 다음 세대를 위한 저의 역할이자 책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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