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가족 탈북하며 ‘생사’ 갈림길 여러번 넘겨
한국 정착 후 우울증→일·학업 병행으로 극복
산업은행 취직 후 북한 경제 관련 전문가로 활동
통일부 산하 이직해 ‘북한이탈주민’ 정착 지원
김영희 남북하나재단 대외협력실장이 17일 오후 서울 마포구 통일부 산하 남북하나재단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
[헤럴드경제=김용재 기자] “‘보름간 쉬고 오겠습니다’ 하고 다니던 기업소를 떠났어요, 근데 그때까지만 해도 그 휴가가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습니다.”
통일부 산하 남북하나재단 김영희 대외협력실장. 사실 그녀는 ‘어쩌다 북한이탈주민’이다. 북한의 ‘인텔리’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지금은 ‘1호 탈북 박사 부부’로 대한민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기까지 수없이 많은 고비를 넘어왔다. 평생을 열정적으로 살아왔음에도, 그녀는 오늘도 ‘감사한 마음’을 품은채 북한을 탈출한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1965년 함경북도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북에서의 학창 시절, 그녀는 항상 학년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다. 학교 내 간부직도 늘 그녀의 몫이었다. 부모님도 언니도 동생도 ‘학업’에 몰두해 모두 대학을 나온 보기 드문 집안이었다. 선생님을 꿈꾸다, 북한에 하나밖에 없는 경제대학에 입학했다. 그렇게 대학에서 ‘재정학’을 전공하고 결혼을 했다. 남포에서 수출입 관련 기업의 재정 관련 직원이 됐다. 일상은 그렇게 평온했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 북한에 ‘고난의 행군’이 찾아왔다. 경제 관련 업무를 맡았던 그녀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라는 생각에 직면했으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다행인 것은 그녀가 일하던 기업소는 북한에서도 유명한 기업이었다. 북한의 대부분 주민이 배를 곯는 시절이었음에도 배급이 끊기는 일은 없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못 살지’ 라는 생각이 가장 힘들었어요. 당연히 대부분 대학을 졸업한 우리 가족과 일반인들의 삶은 또 달랐어요. 그래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든건 마찬가지였습니다. 사회주의 국가들은 이미 많이 붕괴됐었어요. 이제 우리 가족의 삶은, 북한 사회는 어떻게 되나 그런 고민을 가장 많이 했던 시기 같아요.”
김영희 남북하나재단 대외협력실장이 17일 오후 서울 마포구 통일부 산하 남북하나재단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
어느날 함경북도에 살던 시어머니가 그녀와 남편을 찾았다. 온 가족이 중국에 있는 친척집을 방문하자고 했다. 그녀는 다니던 기업소에 ‘긴 휴가’를 다녀온다고 하고 여행에 동참했다. 그리고 그것이 북한에 남겨진 가족과의 이별이었다. 며칠 동안 기차를 타고 도착했더니, 만난 것은 ‘탈북 브로커’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언젠가 북한에 다시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북한을 영영 떠날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사실. 시어머니의 결단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 제가 한국에서 일하고 있지 못하겠죠. 한가지 아쉬운건 부모님 사진이라도 챙겨왔어야 하는건데, 그건 지금 생각해도 아쉽네요.”
탈북 과정은 생과 사를 넘나드는 위험천만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북한의 국경은 말 그대로 ‘감시 사회’ 였다. 남편은 인근 주민의 신고로 여러 차례 국경 수비대에 끌려갔다가 빠져나왔다. 브로커가 마련해준 마을의 구석진 창고에 노령의 시어머니, 남편, 어린 두 아들과 함께 오랜 기간 숨어 지냈다.
북한 국경을 건너는 날, 국경을 넘다가 남편·아들들과 아찔한 ‘생이별’을 겪기도 했다. 남편과 아들이 낭떠러지로 떨어진 것이다. 6살과 8살. 두 아들은 가시에 찔리며 맨발로 두만강까지 오면서도 한마디 비명소리도 내지 않았던 용감한 아이들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국경을 건너는 순간이 생생해요. 남편은 당시에도 안경을 착용했어요. 남편이 그러더라고요. 낭떠러지로 떨어지면서 ‘안경이 당연히 깨졌을거다’ 싶었다고요. 남편도 ‘이렇게 아무것도 안보이고 국경을 못넘겠구나’ 싶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안경이 멀쩡하더래요. 심지어 안경도 떨어진 바닥 근처에서 발견했대요. 하늘이 도왔구나 싶었어요.”
김영희 남북하나재단 대외협력실장이 17일 오후 서울 마포구 통일부 산하 남북하나재단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
그들은 기적처럼 다시 만나 함께 북한 국경을 넘었다. 그렇게 또 다른 브로커를 만났고, 중국에 있는 친척집을 향했다. 중국에서도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이웃의 신고로 남편이 공안에 체포됐다. 벌금을 내겠다고 말하고 석방되긴 했지만, 그날 도시를 도망치듯 떠났다. 여러 도시를 거쳐 한국에 입국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여름이었던 계절은 한겨울이 되었다.
한국에 들어오면 ‘빛’이 보일 줄 알았지만, 다른 고난의 시작이었다. 한국에서 그녀는 그저 ‘연변 아줌마’일 뿐이었다. 닥치는 대로 일을 찾았다. 마트에서도 일하기도 했다. 재정 업무 경력을 살려 카센터에 취업했지만, 견디기 힘든 편견과 차별에 시달렸다. 그렇게 우울증도 찾아왔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한국에 오면 모든게 잘 될거라 생각했는데…”라는 생각도 커져만 갔다.
“카센터를 그만두고 집으로 가는 길에 정말 많이 울었어요. 집에서 기다리는 아들들은 어떻게 먹여 살려야 하나. 우리 부부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눈앞이 캄캄하더라고요. 그때는 그렇게 죽고 싶고 그런 마음이 우울증인지도 몰랐어요. 그래도 저는 멘탈이 강한 편이더라고요. ‘탈북도 했는데 무엇을 못 하겠냐’ 라는 생각으로 버텼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녀에게도 다시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북한이탈주민 지원단체를 만나고 “북한 연구 분야를 공부해 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남편과 함께 경남대 북한대학원에 입학했다. 석사 학위를 마치고 쉬지 않은 채 바로 동국대 북한대학원 박사 과정에 나란히 입학했다. 그런 그녀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산업은행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북한이탈주민’을 특별채용으로 뽑는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녀는 원래 북한이탈주민들과 함께 창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민이 많았다. 일을 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박사 공부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산업은행 북한연구팀 연구원’을 선택했다. 회사에서도 사회에서도 낯선 존재였다. 이 시선을 극복하기 위해 그녀는 끊임없이 열정을 갖고 노력했다. 한참 어린 후배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매일 필사하며 한편, 두편 연구 논문을 써내려 갔다.
“사실 정말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한국에 와서 닥치는 대로 뭐든 배우고, 기회를 잡으려고 노력했던 것이 성과를 맺은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이 감사하다’라는 마음으로 버텨냈던 것 같아요. 제가 처음으로 쓴 논문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리고 그때 쓴 내용들이 통일부에 올라가더라고요. ‘내가 통일에 일조하고 있다’는 생각에 정말 뿌듯했습니다.”
그렇게 그녀의 ‘열정’은 ‘북한 경제전문가’라는 모두의 인정을 이끌어 냈다. 남편은 2011년, 그녀는 2013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탈북민 최초의 부부 박사가 탄생한 것이다. 그렇게 이력도 화려해졌다. 산업은행 수석연구원, 북한경제팀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 상임위원,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자문위원, 통일부 정책자문위원, 기획재정부 중장기전략위원회 민간위원을 지냈다. 그녀가 정책자문을 지낸 부처만 국회, 통일부, 외교부, 국방부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김영희 남북하나재단 대외협력실장이 17일 오후 서울 마포구 통일부 산하 남북하나재단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
그녀는 지금 다른 도전을 하고 있다. 15년간 몸담았던 산업은행 선임연구위원을 그만두고 통일부 산하 남북하나재단 대외협력실로 이직한 것이다. 그녀는 이 결정의 이유로 ‘부채 의식’을 꼽았다.
“탈북한 후배가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이제 언니가 북한이탈주민들을 위해서 좀 일해주면 안되겠느냐’ 라고요. 북한이탈주민들을 돌이켜보면서 ‘이들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많았어요. 북한이탈주민들 정말 열심히 살거든요. 급여나 처우가 문제가 아니에요. 저희 아이들도 마찬가지에요. 이제 30대가 됐습니다. 어엿한 사회인이 된 셈이죠. 가시가 박힌채 숨죽여 두만강을 건너던 아이들이 이제는 작은 기업을 대표하고 있어요. 누구에게나 시간은 다르지만, 적응할 시간과 도움이 꾸준하게 필요하다는 얘깁니다.”
남북하나재단 대외협력실은 ‘통일’을 대비하는 곳이다. 북한이탈주민의 성공적인 정착 사례를 알리고, 이를 바탕으로 이들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재단에서는 이외에도 ▷홍보전략 개발, ▷북한이탈주민 국민 인식 개선 ▷정착지원 민간단체 협력 지원 ▷기부금 조성 등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녀는 재단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긍정적인 인식을 쌓고, 통일 미래를 위한 사회 통합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녀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적응하는 시간, 지원이 필요하다”라며 “통일을 미래라고 생각하고,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재단은 ‘친절한 하나씨’라는 유튜브도 운영하고 있다. 2013년 개설된 유튜브는 대외협력실의 노력 끝에 현재 구독자가 1만9300명을 끌어모았다.
현재 공식적으로 집계된 북한이탈주민의 수는 3만5000여명 가량이다. 북한이탈 주민의 보호 및 정착 지원에 관한 법률이 1999년에 제정되고 25년이 흘렀다. 최근에는 이 제도가 안정적으로 정착됐지만, 일각에서는 한국 주민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는 “결국 북한이탈주민도 똑같은 사람”이라며 이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여전히 필요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모든 북한이탈주민은 북한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트라우마’가 생깁니다. 악착같이 두만강을 넘고, 압록강을 건너서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이곳에 왔는데, 이곳에서도 숨어 살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도 저는 북한에서 막 넘어온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살자’라고 항상 말해요. 북에서의 힘든 시절을 생각하고, 북한을 넘을 때를 돌이켜 보면서 이곳에서 치열하게 살면 못할게 없다고요. 다만 우리나라의 인식도 조금씩 바뀌면 좋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른 차원에서 왔다, 도움이 필요하다’라는 생각. 그 ‘작은 생각’ 조금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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