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정부 지원없이 열린 첫 전시’ 눈길
김연수 번안 ‘걸리버여행기’ 속 이상향 주목
현재의 절망 버리고 ‘미래 행복’ 찾기 집중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개막한 ‘서울국제도서전’에 관람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이정아 기자 |
‘2024 서울국제도서전’ 주제도서로 선정된 ‘걸리버 유람기’ 표지 |
“당신의 후이늠은 무엇인가요?”
국내 최대 책 축제 서울국제도서전이 30일까지 5일간의 일정으로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진행 중이다. 올해로 66회째를 맞은 이 행사는 19개국 452개의 참가사가 모여 전시, 강연, 세미나, 이벤트 등 450여 개의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아직 정부와 출판계 간 갈등이 봉합되지 않은 상황이라 올해 전시는 정부 보조금을 전혀 받지 않은 첫 전시회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도서전 참가사가 지난해에 비해 15% 가량 줄었다. 하지만 책 축제를 즐기려는 관람객들은 오히려 늘어 행사 첫날인 26일부터 코엑스는 애독자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뤘다.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 관계자는 “관람객 수가 아직 정확하게 집계되지 않았지만, 사전 예매율로만 보면 최소 5만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2만 명)에 비해 2.5배 늘었다”고 전했다.
도서전 한쪽에는 올해 주제인 ‘후이늠’에 대해 새롭게 사유할 수 있도록 주목한 400권의 도서 전시가 설치됐다. 후이늠은 ‘걸리버 여행기’에서 주인공이 네 번째 여행지에서 만난 나라로, 올해 도서전의 주제어다. 완벽한 이성을 가진 ‘말(馬)’이 사는 이곳은 무지, 오만, 욕망, 비참, 전쟁, 다툼 등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곳이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걸리버 여행기’에는 후이늠이 나오지 않는다. 국내에 소개된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1909년 육당 최남선이 번역·번안한 것으로, 소인국과 대인국이 나오는 1~2부만 축약해 반영됐다. 소설가 김연수(54)는 이번 행사를 위해 라퓨타, 후이늠 등이 나오는 4부작의 걸리버 여행기 전체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새로운 버전의 걸리버 여행기를 내놨다.
김연수는 ‘걸리버 여행기’ 유럽 판본에서 표기한 ‘한국해(Sea of Corea)’가 소설 ‘홍길동전’에서 나오는 이상 국가 율도국이 위치한 곳이라는 점을 착안, 재치 넘치는 장면을 더했다. 걸리버가 일본 나가사키에서 배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 만난 조선인의 우두머리를 홍길동으로 설정한 것이다. 언어, 감옥, 죽음이 없는 ‘3무(無)’ 율도국에서 온 조선인을 만난 걸리버라서, 그의 여행기는 더욱 친근하게 느껴진다.
이와 함께 김연수의 ‘걸리버 여행기’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착각에 젖어 누리는 특권이 없는 땅에서 인간 욕망이 더는 부질없음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걸리버 여행기’에는 풍부한 상징과 은유와 함께 뼈 때리는 조언도 가득하다. 절망의 굉음이 전 세계에 울려 퍼지는 요즈음, 신랄한 각성이 아닐 수 없다.
“상상해보라. 그 모든 멍청한 짓거리들이 사라진 세상을. 우크라이나 전쟁, 가자 전쟁, 유가 폭등, 기후 위기, 온실가스 배출, 보이스 피싱, 전세 사기, 악플, 왕따, 학교 폭력, 노동 착취, 돈에 미친 자들이 없는 세상을. 그것들은 원래 없었던 것이니 앞으로도 없어질 것들이고, 나는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 있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반면 걸리버가 만나는 야후라는 존재는 후이늠의 말보다 열등하지만 자기중심적 선언을 밥 먹듯이 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한 발 떨어져서 보게 만든다. 역자는 야후에 대해 “자연이 창조한 동물들 중에서 가장 추악하고 더럽고 기형적”이며 “한 줌의 이성으로 착하지 않은 짓에만 골몰하는 족속”이자 “어떤 진실이 있는지 몰라서 거짓말을 하면서도 거짓말인 줄 모르는” 종족으로 소개한다. 인간 그 자체인 셈이다. 김연수는 “당시 조너선이 (작품을 통해) 인간에 대해 깊이 절망했지만, 오래전 멸망했을 인간 사회가 현재까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희망적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올해 도서전의 주빈국은 사우디아라비아다. 행사장에서는 도서 전시, 공연, 드로잉 등을 사우디아라비아가 가진 독특한 문화유산과 예술이 소개된다. 아랍 작가로는 최초로 2019년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한 오만의 조카 알하르티, 15년 만에 신작 ‘사라진 것들’을 출간한 앤드루 포터, ‘H마트에서 울다’의 저자인 미셸 자우너 등의 강연도 열렸다.
한편 도서전 개막식에서는 전병극 문화체육관광부 제1차관의 축사 도중 출협 임원진 10여 명이 정부의 예산 지원 중단에 반발하는 묵언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문체부가 등돌린 도서전 독자들이 살립니다’, ‘책 버리는 대통령 책문화 짓밟는다’, ‘검찰식 문화행정 책문화 다 죽는다’ 등이 적힌 어깨띠를 몸에 두르고 전 차관 앞에 도열했다.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직접 축사를 하고 박보균 문체부 장관이 참석했던 지난해 도서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기류다.
앞서 문체부는 해마다 도서전 지원을 위해 국가보조금 방식으로 총 40억 원의 행사 비용 중 7억7000만원 정도를 지원해왔다. 전 차관은 축사에서 “올해 정부는 도서전을 주최하는 출협이 아닌, 출판사를 직접 지원했다”고 말했다. 이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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