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정뱅이 연대기/ 마크 포사이스 지음/ 임상훈 옮김 / 비아북 |
“술 한잔 할래?”
유난히 힘들었던 하루의 끝, 혹은 남녀 간 ‘썸’의 언저리 어딘가에 친구나 연인으로부터 듣는 이 말은 어떤 말보다도 달콤하다. 현생 인류가 이 땅에 존재한 150여만년 전부터 술이 우리의 기분을 들뜨게 하고 관계를 부드럽게 만든 역할을 톡톡히 한 덕이리라. 물론 이성을 흐리게 하고 폭력 성향을 높이는 부작용이 있어 핍박을 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인류의 역사는 술과 함께 고고히 흘러왔다.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마크 포사이스는 신간 ‘주정뱅이 연대기’에서 인류의 동반자인 술이 사실 우리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었다는 다소 도발적인 주장을 펼친다. 인간이 술을 만든 이후 술은 때로 폭력을, 때로는 평화를 알선하며 ‘인간 욕망의 모든 것’이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긴 시간, 사람들이 어떻게 술에 취했고 그런 상황들이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피는 저자의 시각이 신선하다.
이 책에 따르면 18세기 영국 ‘진(Gin)의 여신’ 마담 제네바는 런던이라는 대도시의 질서를 유지하는 일종의 파수꾼이었다. 인구 2만명 이상의 도시가 두 곳 뿐이던 1700년대 영국의 경우 당시 런던의 인구는 60만명이나 됐지만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공권력이 없었다. 사회보장 기능을 담당했던 마을 교구 역시 제 역할을 할 수 없어 슬럼가와 판자촌에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처참한 현실 속 빈민들은 폭동을 일으키기 보다 진을 마시며 ‘망각’을 선택했다. 지하 술집에서 싼 값에 진을 건네주는 마담 제네바가 그들의 고통을 위로해주는 구세주였던 것이다.
러시아 독재자들과 술의 관계 역시 흥미롭다. 특히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대중에게는 공포정치로, 라브렌티 베리야, 니키타 흐루쇼프 등 최상위층에겐 ‘과음정치’로 소련을 통치했다. 그는 밤마다 중앙위원회를 소집해 간부들에게 보드카를 강권했다. 정작 본인은 많이 마시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덕분에 간부들은 서로 반목하고 싸웠고, 술도 안 깬 상태에서 다음날 출근을 하다 보니 ‘스탈린 축출’ 같은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스탈린의 작전이 제대로 먹힌 셈이다.
1920년대 미국에서 시행됐던 금주법은 사실 페미니즘 운동의 일환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 미국에서는 남편이 월급을 받으면 살룬(미국 남성들이 위스키나 맥주를 마시던 선술집)에서 다 써버리고 무일푼으로 화가 난 상태로 집에 와 아내를 때린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통계적으로 주취 배우자가 가정폭력을 얼마나 휘둘렀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1890년대 미국 중서부 지역에서 여성을 중심으로 반(反)살룬연맹이 결성된 점은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곡물 등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 증류주 제조를 금지시켰다. 또 여성 참정권 시대가 도래하면서 여성 표심을 잡기 위해 정치권이 적극적으로 움직이자 설마했던 금주법 국회 통과가 현실이 됐다. 금주법이 시행됐던 1920~1933년, 공식적으로 미국의 주류 사업은 올스톱됐지만, 밀주가 성행하며 술 소비는 오히려 더 느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밀주의 인기로 재즈나 이탈리아 음식(모두 밀주와 함께 즐긴 문화)이 발전했다는 점은 의외의 성과다.
더 아이러니한 점은 금주법이 끝난 것은 술을 원했던 대중의 요구 때문이 아니었다. 1929년 미국을 강타한 대공황 탓이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가난한 많은 사람을 고용할 수 있는 산업이 필요했고, 금주법을 폐기해 주류 산업 내 일자리를 만들었다.
신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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