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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슈퍼스타 대타‘ 힐러리 한, 나흘간 같은 드레스도 감동이었다 [고승희의 리와인드]
9~10일 서울시향 대체 협연자 무대
11~12일 해플리거와 듀오 리사이틀
서울시향의 대체 협연자로 무대에 선 힐러리 한/고승희 기자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명징하고 우아한 선율, 단 한 음도 허투루 다루지 않고 마지막까지 활 시위를 당겨 마침표를 찍는다. 섬세하고 깊이 있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를 단 한 음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객석 사이사이에서 느껴졌다. 모두가 숨을 죽였고, 마지막 악장까지 마친 이후에야 참았던 함성을 쏟아냈다.

‘슈퍼스타 대타’의 등장이었다. 종이 한 장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주의로 ‘얼음공주’라 불렸던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본의 아니게’ 나흘 연속 한국 관객과 만난 그는 온화한 ‘봄날의 여왕’이었다.

지난 8일 협연자 손열음과 서울시립교향악단의 마지막 리허설 날이었다. 서울시향에 따르면 손열음의 “고열을 동반한 심각한 인후염”으로 리허설 중 공연 중단이 결정됐다.

손열음은 얍 판 츠베덴 신임 음악감독의 취임 첫 시즌 중 임윤찬과 함께 가장 기대를 모았던 협연자였다. 그의 ‘티켓 파워’ 덕에 이틀간의 공연은 일찌감치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하지만 당일 늦은 오후 협연자 하차 소식이 전해지자 취소 티켓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하며 서울시향은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공연을 하루 앞두고 ‘대체 협연자’를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때마침 한국에 도착했던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이 서울시향의 ‘구세주’였다.

‘기적 같은 타이밍’이었다. 클래식 업계에 따르면 힐러리 한은 11일 서울 예술의전당, 12일 남한산성아트홀에서 안드레아스 해플리거와의 듀오 리사이틀을 앞두고 일찌감치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힐러리 한이 서울시향과의 협연 제안 문자를 받은 것도 인천공항에 도착해 휴대폰을 켰을 때였다고 한다. 츠베덴 감독이 뉴욕필을 이끌 당시 상주음악가(2023~2024 시즌)로 인연을 맺었기에 음악적 호흡은 무리가 없었다. 서울시향에 따르면 힐러리 한이 흔쾌히 수락해줘 이번 공연을 열 수 있었다.

서울시향과의 첫 협연 무대를 마친 힐러리 한이 관객에게 90도로 인사하고 있다./고승희 기자

힐러리 한은 클래식 음악계도 놀란 ‘대타’ 협연자였다. 힐러리 한은 데카, 도이치 그라모폰, 소니 클래식 등 세계적인 클래식 레이블을 모두 섭렵하며 다작의 음반을 냈다. 무려 세 번이나 그래미상을 수상했고, 2023년엔 뮤지컬 아메리카 올해의 아티스트로 선정됐다. 명실상부 세계 최정상 스타 중의 스타다. 때문에 힐러리 한의 대체 투입은 ‘으리으리한 슈퍼스타’의 의리라 봐도 무방하다.

공연 프로그램은 힐러리 한의 올해 협연 레퍼토리였던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서울시향은 세계적인 스타를 협연자로 함께 하며 국내 최고 악단으로의기본기를 평가받는 상황이 됐다. 리허설은 첫 공연이 있던 9일 오후 3시 단 한 번뿐. 시험대에 오른 서울시향의 기량을 매섭게 지켜보는 눈도 많았다.

뚜껑을 연 ‘얍 판 츠베덴과 힐러리 한’의 만남은 성공적이었다. 준비할 시간은 여의치 않았지만, 서울시향과 츠베덴 감독은 힐러리 한의 음악과 해석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조화를 만들어갔다. 공연 내내 잊지 못할 명장면도 만들어졌다. 힐러리 한은 여느 협연자들과 달리 서울시향 연주자들의 음악을 경청하며 음악의 선율을 충분히 느꼈다. 심지어 오보에, 플루트 등의 관악 파트를 연주할 때 뒤를 돌아 연주자들의 모습을 바라보기도 했다. 현악 파트의 선율에 맞춰 몸과 고개를 움직이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츠베덴 감독과 힐러리 한은 눈을 맞추며 수시로 미소를 주고 받았다.

솔리스트로 최정상에 올라 있으면서도 힐러리 한은 누구보다 소통하는 연주자였다. 그와 서울시향은 첫 호흡에도 사랑스럽고 따뜻한 대화를 나눴다.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연주, 그 찬연한 음악 안에 숨어든 깊은 서정과 드라마에서 힐러리 한의 진짜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둘째 날 공연엔 그의 음악 단짝인 안드레아스 해플리거가 찾아오기도 했다.

이틀간의 협연을 마친 힐러리 한은 쉴 틈도 없이 본 게임에 돌입했다. 11일 예술의전당에서 해플리거와 브람스 듀오 리사이틀로 한국 관객과 다시 한 번 만났다. 브람스 소나타 1, 2, 3번을 들려주는 무대였다. 힐러리 한은 나흘 내내 푸른 드레스를 입으며 예기치 않은 ‘단벌신사’가 된 것 마저도 한국 관객에겐 잊지 못할 추억이었다.

힐러리 한과 안드레아스 해플리거의 듀오 리사이틀/고승희 기자

이날 공연이 조금 더 특별했던 것은 ‘비의 노래’라는 부제를 가진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을 비 오는 날에 마주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만들어낸 바이올린과 찬란한 피아노가 만나자 아련한 음악이 들려왔다. 여름날의 연인을 마주하는 듯한 2번, 극적인 드라마의 3번까지 두 사람의 음악에선 서로에 대한 신뢰와 자신감을 만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함께 해온 한과 해플리거는 ‘이상적인 듀오’의 대명사다. 해플리거는 “서로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서로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있다”며 “이 점이 완벽한 앙상블을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한 역시 “우린 서로 매우 다른 아티스트지만, 전통성과 새로움의 균형에 대해서는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며 “우리가 가진 솔로, 실내악 음악의 개별적인 경험과 레퍼토리에 대한 공통된 관심이 좋은 호흡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듀오 무대에선 바이올린만으로는 특정 해석을 끌고 나가기 어렵고, 전 주도권을 가지고 싶지도 않아요. 그건 얼음 위에서 한 개의 바퀴만을 가진 자동차로 달리는 것과 같아요. 듀오는 함께 아이디어를 가지고 거침없이 어느 방향으로든 나아갈 수 있어야 해요. 각자가 자유로워야 하며, 서로에 대해 이해할 수 있어야 하죠. 그것이 제가 지향하는 듀오로서 상호작용이에요.”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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