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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덕 단장 “죽음에서 찾은 삶의 의미…백미는 ‘군무(群舞)’” [인터뷰]
국립무용단, 올 첫 신작 ‘사자의 서’
제작 기간만 2년…‘덕테일’이 별명
불교 경전 ‘티베트 사자의 서’를 몸짓 언어로 옮긴 국립무용단의 ‘사자의 서’. [국립극장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잿빛의 텅 빈 무대, 이승과 저승 사이 어느 틈. 허공에 매달린 일곱 망자가 심판을 기다린다. 혼불이 돼 흩어져 이승을 떠도는 망자들을 두고, 일곱 명의 무용수가 그들을 위로하듯 일렬로 들어선다. 위패처럼 들고선 고무 파이프가 첫 번째 무용수를 시작으로 두 번째, 세 번째,…,일곱 번째까지 풍차처럼 회전한다. 동일한 속도, 동일한 보폭, 동일한 움직임이 혼불이 된 망자들을 다시 소환한다.

“무심히 뒤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 가시오, 그대 부디 잘 가시오.” (‘사자의 서’ 중)

국립무용단의 ‘사자의 서’, 망자들의 ‘49일의 여정’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난해 4월 국립무용단에 부임한 김종덕 예술감독 겸 단장은 올해 첫 작품으로 ‘사자의 서’(4월 28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를 올리며 “죽음이 아닌 우리 삶의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라고 귀띔했다. 작품의 부제는 ‘49일의 여정’이다.

최근 국립극장에서 만난 김 단장은 “코로나19가 찾아왔을 때 감염병으로 인해 언제 죽을지 몰라 생사를 넘나드는 시기를 마주하며 삶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다”고 했다.

‘사자의 서’의 본격적인 제작 기간은 2년 가량. 김 단장은 보통 이 정도의 시간을 투자해 하나의 작품을 구상한다. 그의 작업 방식은 ‘몸의 언어’로 표현하는 보통의 공연 작품과는 다르다. 영화나 드라마 감독처럼 한 편의 영상 콘텐츠를 만들 듯 작품의 방향성을 정하고, 스토리 보드로 주요 장면을 구상한다. ‘덕테일’(김종덕+디테일)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김종덕 국립무용단 예술감독 겸 단장 [국립극장 제공]

김 단장은 “하나의 아이디어가 나온 뒤 구체화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편”이라며 “각각을 어떻게 연결할지, 무용수들이 수용 가능한 안무인지, 무대 미술과 조명까지 고려해 계산한 뒤 연습에 돌입한다”고 말했다.

“무용수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정리가 돼야 하고, 중심을 잡아야 해요. 제가 자리잡지 못하면 배가 산으로 가게 되니까요.”

이 작품에 씨앗을 뿌린 것은 2020년 4월 피크닉 갤러리에서 열린 대만 작가 차웨이 차이의 설치전 ‘바르도(Bardo)’였다.

“바르도는 망자들이 구천을 떠돌 때 머무는 공간인데, 그곳을 석실 무덤처럼 만들고 향을 꽂아 죽은 뒤 환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보여주면서 티베트 사자의 서 구절을 낭송하더라고요.” ‘바르도’가 뭔지도 몰랐던 그는 경전부터 찾아 읽었다고 한다. 이 경전은 8세기에 저술, 사후세계를 경험한 라마승의 증언을 근거로 써내려간 ‘망자를 위한 지침서’다.

불교 경전 ‘티베트 사자의 서’를 몸짓 언어로 옮긴 국립무용단의 ‘사자의 서’. [국립극장 제공]

김 단장은 이 전시에서 영감을 받아 ‘사자의 서’의 스토리텔링 작업을 시작한 후 안무를 구성했다. 가야금 연주자인 황진아에게 음악을 의뢰한 것도, 주역 무용수 4명과 작품에 대해 소통하기 시작한 것도 지난해 여름이었다. 그러니 작품의 준비 기간이 상당히 길었던 셈이다.

‘사자의 서’는 국립무용단의 강점을 보여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일 년째 단체를 이끌고 있는 김 단장은 “국립무용단은 굉장히 스펙트럼이 다양하다”며 “전통 춤에 특화돼있고, 음악에 따라 몸짓이 창의적”이라며 “‘이 좋은 재료를 어떻게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을까’를 가장 고심했다”고 말했다. 20~50대의 폭넓은 연령대, 편향 없이 고른 기회를 줘야 하는 단체의 특성은 ‘맹점’이었으나, 김 단장은 합리적 방안으로 대극장에 올려야 하는 이 작품을 선택했다. ‘사자의 서’엔 단원 51명이 전원 출연한다.

이 작품은 특히 김 단장이 그간 추구해온 작품 세계의 연장선 상에 놓여 있기도 하다. ‘사계-꼭두의 눈물’(2008), ‘굿바이 맘’(2013)을 통해 삶과 죽음의 문제를 꺼내든 그가 다시 한 번 전하는 담담한 생사의 성찰이다.

작품은 불교 경전 ‘티베트 사자의 서’를 몸짓 언어로 이야기한다. 70분 가량 이어지는 무대는 총 세 개의 장으로 꾸몄다. 1장 의식의 바다, 2장 상념의 바다, 3장 고요의 바다로 나뉜다. 그는 “제의적 요소가 강한 작품”이라며 “1장에서 망자가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이라는 단계를 거치는 과정을 춤으로 보여주고, 2장에선 49일의 여정에서 마주하는 지난 생을 보여준 뒤, 3장에선 남아있는 사람들이 망자를 보내는 장면을 그려간다”고 했다.

불교 경전 ‘티베트 사자의 서’를 몸짓 언어로 옮긴 국립무용단의 ‘사자의 서’. [국립극장 제공]

작품엔 자타공인 ‘국내 최고’의 국립무용단 단원들이 가장 잘하는 것을 모두 채워넣었다. 일종의 ‘춤의 경전’이라고 부를 만하다. 각각의 장마다 맺고 풀고 어르고 당기는 한국 춤의 본질이 묻어나면서도 금세 얼굴을 바꿔 역동적이고 현대적인 칼군무가 이어진다. 김 감독은 “고전성과 동시대성을 오가는 안무의 구성, 서정성과 다이내믹을 오가는 몸짓, 전통의 가락과 첨단의 음악이 하나로 녹아져 있고, 관객들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연결했다”고 말했다.

김 단장은 안무를 짤 때 ‘몸짓 언어의 난해함’을 덜어내는 것에 중점을 둔다. 때문에 작품 곳곳에 상징적 장치를 심어 전체 스토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한 무용’을 그려간다. 그와 함께 무용단 단원인 이재화와 정소연이 각각 남성 군무와 여성 군무를 짰다. “남성 군무는 스타카토처럼 ‘전쟁 같은 일상’을 역동적으로, 여성 군무(‘그대 잘 가시오’)는 흐르는 동작들로 아다지오의 서정적 표현으로 구성했다”는 설명이다. 저마다의 개성과 장점을 드러내는 춤이 많았던 국립무용단이 조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군무는 ‘사자의 서’의 백미다.

불교 경전 ‘티베트 사자의 서’를 몸짓 언어로 옮긴 국립무용단의 ‘사자의 서’. [국립극장 제공]

군무 장면을 매만질 땐, 김 단장의 디테일이 특히나 살아난다. 연습 과정에선 단원들의 턱의 위치, 방향, 손끝, 어깨, 호흡까지 바로잡는다. 그는 “무대에선 아주 작은 차이가 더 커보인다”며 “개성을 강조할 때와 통일성을 줘야 할 때는 질감이 달라야 하고 무대에선 희한하게 잘 한 것보다 실수가 더 잘 보여 완벽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며 웃었다.

막을 올린 ‘사자의 서’는 기존 국립무용단의 강점을 끌어내면서도 신임 단장과 함께 하는 단체의 새로운 방향성을 보여준다. 그간 국립무용단은 ‘향연’, ‘묵향’ 등 단체의 대표 레퍼토리가 될 만한 걸작을 냈지만, 두 작품 이후 10년간 대표작이 없었다는 것은 무용단의 깊은 고민이다.

김 단장은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동시대성을 확보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며 “단체를 대표할 만한 신작으로 세련된 무대의 한국적 현대무용을 보여주며 지금 우리 시대의 예술로 인정받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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