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시간 뺏고 해외팬 주머니 털어
음콘협 “부작용 심각…우리부터 없앤다”
K-팝 시상식이 20여개가 난립하면서 공정성과 권위를 상실해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사진은 음악관련단체의 한 시상식. |
[헤럴드경제 =서병기 선임기자]“죄송한데요. 이 상 안 받아도 되나요?”
대중가수에게 연말 시상식에서 받는 각종 상들은 그해 해당 가수가 얼마나 열심히 활동했고, 팬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는 지에 대한 척도가 된다. 이에 상을 준다고 하면, 아니 후보에만 올라가도 만사를 제쳐주고 시상식으로 향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하지만 요즘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 수상자가 됐다고 하면 반가워하기 보다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심지어 상을 안 받기를 원하거나, 심지어 시상식을 ‘공포’라고 표현하는 관계자도 있다. 워낙 대중음악 시상식이 많아지다 보니 시상식 참여에만 아티스트나 제작자의 시간이나 노력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다.
사실 K-팝 발전 과정에서 ‘K-팝 시상식’이 순기능을 한 적도 있었다. 시상식 행사 수가 적을 때에는 음악산업과 가수·제작자들이 함께 발전한다는 상생의 원리가 그런대로 적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K-팝 시상식이 20여 개나 되는 지금은 그 취지를 넘어서다 못해 과도해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15일 한국음악콘텐츠협회(이하 음콘협, 회장 김창환)에 따르면, 4월 현재 콘텐츠 기업과 음원 플랫폼업체, 음악관련 단체와 협회, 언론사 등이 주최하는 대중음악 시상식은 20여 개에 이른다. 세계 1위이자, 국내 시장의 18배나 큰 음악시장을 보유한 미국이 그래미 어워즈, 빌보드 어워즈, 아메리카뮤직 어워즈 등 단 3개의 시상식을 운영하는 점을 고려하면 K-팝 시상식은 과도하게 많은 셈이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K-팝 시상식은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최근 5년 간 새롭게 생겨난 시상식이 5개가 넘고, 올해에도 3~4개가 신설될 예정이다.
이처럼 시상식이 난립하다 보니 차별성이 사라지고 있다. 보통 대한민국 공인 음악 차트인 써클차트(가온차트)를 기반으로 몇몇 사항 만을 추가한 음악 시상식들이 적지 않다. 이런 시상식들은 주최 측만 다를 뿐 시상 내용이 똑같은 시상식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나 최근 시상식이 급증하면서 주최 측끼리 톱스타를 참가시키려는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과열되는 양상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가수와 제작자들에게 돌아온다. 가수와 제작자들이 창작이나 공연 활동 시간을 줄여 시상식에 참석하고 있는 탓이다.
무엇보다 일부 K-팝 시상식은 수익만을 추구하면서 공정성과 객관성을 잃다 보니 부작용도 속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음콘협은 최근 “최근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는 K-팝 시상식 개최에 우려를 표하며, 세계로 나가는 K-팝 산업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시상식 문화가 자리 잡기를 간절히 호소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성명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음콘협은 입장문에서 “명확한 기준으로 평가하여 권위와 가치를 드높이는 시상식이 아닌, K-팝의 성공과 팬덤에 편승하는 쇼 중심의 일회성 이벤트로 퇴색하고 있는 시상식에 우려를 표한다”면서 “K-팝이 전 세계적 문화 현상으로 자리매김한 현 상황에서 산업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시상식 문화가 자리 잡기를 바란다”며 무분별하게 개최되는 K-팝 시상식들의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이와 함께 K-팝 시상식은 점점 더 수익 확장을 노리면서 국내가 아닌 해외 개최를 선호하고 있다는 점도 무리수로 작용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K-팝 글로벌 팬들을 대상으로 비싼 값에 티켓을 판매할 수 있어 수익을 더 낼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예컨대 최근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개최된 K-팝 시상식 티켓은 무려 59만원의 고가에 판매됐다. 티켓을 구입한 주 대상이 10~20대 초반 K-팝 팬이었음을 감안하면 매우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일부 K-팝 시상식이 수익에 집중한 나머지 현지 물가에 맞지 않는 티켓 가격을 책정하여 K-팝 산업 자체가 해외 팬들의 원성을 듣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시상식이 '앱'을 통한 유료 인기 투표를 활용하면서 이 역시 시상식의 주요 수익 모델이 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유료 투표로 특별상을 시상하고 그 결과를 본상에 큰 비율로 반영하는 등 시상식과 팬 사이의 긍정적 커뮤니케이션을 넘어 팬들 간의 경쟁심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상식의 유료 투표에 경쟁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전 세계 팬들 입장에선 경제적 부담과 함께 피로감이 더욱쌓여갈 수 밖에 없다.
이런 식의 시상식 마케팅은 K-팝의 글로벌 발전 방향과는 배치된다는 게 가요계의 전반적인 시각이다. 방시혁 하이브 의장은 얼마 전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나와 “최근 주요 시장에서 발견된 K-팝 관련 지표의 하락이라는 위기론의 근간은 강력한 팬덤의 소비”라면서 “K-팝을 강렬하게 소비하는 헤비팬덤이 확장성의 한계가 되기도 하는데, 가벼운 마음으로 K-팝을 소비하는 라이트 팬덤도 많이 붙을 수 있는 구조로 더 가야 K-팝이 확장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앱'을 통한 유료인기 투표로는 방 의장이 말한 라이트 팬덤을 확보할 수 없다.
K-팝 시상식이 20여개가 난립하면서 공정성과 권위를 상실해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사진은 음악관련단체의 한 시상식. |
여기에 20여개 K-팝 시상식 주최 측의 극심한 섭외 경쟁으로 아티스트와 매니지먼트사는 출연 강요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실질적으로는 축하 공연을 강요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경우가 많은데도, 대부분 '을(乙)'일 수밖에 없는 아티스트와 매니지먼트사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출연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불투명한 선정 기준으로 많은 시상식들이 공정성과 권위, 건강성을 상실했다. ‘출연하면 상을 주겠다’는 제안은 수상자 선정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스스로 부인하는 데도 다수의 K-팝 시상식에서 공공연히 이뤄지고 있다.
유료 모객을 위해서는 아티스트의 출연이 전제로 되어야 하지만 일부 K-팝 시상식은 아티스트에게 지급되는 출연료는 없거나 터무니 없이 적어, 매니지먼트사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키는 경우도 있다. 폭증하고 있는 시상식 출연으로 인해 아티스트 해외 투어, 행사 출연에 제한이 생겨 막대한 기회손실이 발생한다고 매니지먼트사는 하소연하고 있다. 이 정도라면 난립하는 K-팝 시상식이 오히려 K-팝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음콘협은 K-팝 시상식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건강한 성장을 담보하는 음악 시상식이 개최돼 K-팝이 지속 발전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음콘협이 자체적으로 운영하던 써클차트 뮤직어워즈 개최를 무기한 연기하기로 했다. 또 올해 상반기 중으로 K-팝 아티스트를 보호하고 비즈니스 간 분쟁을 예방할 수 있는 음악 시상식 관련 출연계약서 및 가이드라인을 연구해 발표할 계획이다.
대중음악계 관계자는 “세계 음악시장 1위인 미국도 메인 시상식이 3개 밖에 없는데, 한국에는 1년 내내 20여 개의 K-팝 시상식이 열리고 있다”며 “K-팝이 전 세계적 문화 현상으로 자리매김한 지금이야말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올바른 시상식의 방향성에 대해서 고민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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