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세계 최초로 ‘인공지능(AI) 규제 법안’을 만든 것은 이 문제가 우리에게 더는 방관할 수 없는 ‘발등의 불’로 떨어졌음을 의미한다. 신호탄을 터뜨린 유럽의 AI 규제로 글로벌 통상 마찰의 새 뇌관은 작동했고, AI 시대로 치닫는 국내기업에도 세련된 대응책이 숙제로 떠올랐다. 수출이 곧 경쟁력인 국내 산업계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면 AI 규제에 대한 선제 대응은 더욱 절실하다. 하지만 AI 규제에 대한 우리의 현주소는 뒤처져 있다. 세계가 AI 규제 선점경쟁을 하고 있는데도 우리의 관련 법률은 국회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있다. AI 기본법(AI산업 육성 및 신뢰기반 조성에 관한 법률)은 2월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법안소위를 통과했지만 이후 표류 중이다. AI 가이드라인 마련에 관한 한 ‘구경꾼’이라는 자조적인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EU가 AI, 특히 생성형 AI에 대한 규제에 나선 것은 순수한 의도는 아니다. 기술 진보의 반대쪽 거울인 ‘인간에 대한 위협’ 부작용을 경계한다는 것을 표면적 이유로 내걸지만 사실 미국 빅테크기업에 대한 견제용이 강하다. 유럽 산업 보호용이란 뜻이다. 오픈AI ‘챗GPT’, 구글 ‘제미나이’ 같은 미국 빅테크기업의 첨단 기술력에 한참 밀리는 유럽으로선 AI 분야의 세계 표준화 주도권 선점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긴 냄새가 짙다. EU가 챗GPT 등 생성형 AI의 대규모 언어모델에 대한 규제를 유독 강화한 것은 이런 시각을 뒷받침한다. 실제로 EU 규정을 위반한 기업엔 최대 3500만유로(약 497억원) 또는 세계 매출의 7%에 해당하는 벌금을 내도록 했다. 상상 초월의 강력 규제인 셈이다.
EU가 세계 최초로 내놓은 AI 규제법으로 새 글로벌 통상전쟁터가 생긴 것은 분명하다. 2026년 전면 발효가 예상되는 AI법이 현실화하면 미국 빅테크의 유럽 시장 진출계획엔 차질이 불가피하다. EU와 미국의 AI 규제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방식 차이로 높은 장벽이 생겨 AI 서비스와 기술무역은 제동이 걸리고, 특히 다국적 기업으로선 추가 비용을 지불할 수 있다. 특히 강력한 AI 규제를 표방하는 EU와 자율 규제를 내건 미국 간 사생을 건 통상전쟁은 불 보듯 뻔하다. 전 세계 기업 간 ‘AI 분쟁’도 줄을 이을 것이다. 구경꾼으로만 서 있으면 ‘새우등’ 터질 일만 남는다는 의미다.
한국은 지난달 영국에서 열린 ‘AI 안전성 정상회의’의 후속 조치로 내년 5월 열릴 미니 정상회의의 공동 개최국이다. 이때까지는 한국도 최소한 진전된 AI 규범(가이드라인)을 내놔야 체면이 선다. 글로벌 AI전쟁 시대의 기술·표준화 패권의 ‘퍼스트무버’ 대열에 우리도 서둘러 동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