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닛 옐런(왼쪽 맨 아래) 미국 재무장관이 지난 8일 중국 베이징에 있는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허리펑 중국 국무원 부총리와 회담하고 있다. [AFP] |
세계가 ‘패권 복잡계(複雜系)’에 갇혔다. 추격을 불허하는 미국과, 따라잡겠다는 중국 때문이다. 둘(G2)만 싸우면 좋으련만 셋 이상 연루되어 해법은 까다로운 걸 넘어 복잡해졌다. 올해 탄생 300주년인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가 살아 있다면 까무러쳤을 법하다. 분업(分業)이 경제발전·국부(國富) 증대의 핵심이라고 통찰한 그의 논리가 황망해졌다. 분업의 지경(地境)을 확대하면 글로벌 공급망이다. 시장경제 원리에 따라 배치됐는데 패권경쟁 노골화로 ‘중간에 낀’ 한국 기업 등은 손해 최소화를 위해 주판알을 튕겨야 한다.
국부를 따져 보면 G2는 이기적이다. 2018년 세계 부유층의 40% 이상이 미국 시민권자이고, 중국은 5%였다. 20년 안에 미·중 부자의 수가 동일해진다는 전망이 있다. 두 나라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격차를 3%포인트로 가정해서다. 세계의 경제적 불평등이 많이 개선했다고는 해도 빈곤에 시달리거나 부채에 신음하는 국가가 많은데 세계를 분탕질한 G2로 ‘부의 쏠림 현상’이 짙어지는 꼴이다.
G2의 경제가 고전 중이긴 하다. 미국은 ‘완만한 경기침체(mild recession)’ 전망 속에 있다. 기초체력은 미심쩍은데 인공지능(AI) 붐업으로 기술주만 각광받는다. 거품이다. 좀처럼 뜨지 않는 중국 경제도 부동산 위기의 망령이 배회해 뒤뚱거린다. 내부 전열 가다듬기가 먼저인데 권세를 좇는다.
G2라는 이름값이 무색하게 둘은 고매(高邁)하지 않다는 점만 도드라졌다. ‘독재자’ ‘불에 타 죽을 것’이라는 지도자 간 막말전쟁을 보면 다른 결의 관전평을 내기 어려웠다. 파급 효과는 증오·분노의 전 지구적 전염으로 나타났다.
상대를 향한 두려움이 둘의 언어·행동에 서렸다. 백악관이 지난해 가을 내놓은 국가안보 전략에서 중국에 대한 ‘경쟁 우위(out-competing)’를 적시한 건 국제질서를 정하는 권한이 축소될까 불안해서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쌍순환(雙循環·내수와 수출의 동반 성장)’ 전략은 서구와 교류가 약해질 것을 예감하고 대비하자는 ‘왕서방식 메타포’다. 품이 넓지 않은 미국, 신뢰 부족으로 20여년 전에도 유럽 필부(匹夫)마저 ‘차이니스 마피아(chinese mafia)’라고 했던 중국 간 대결은 애초 예고됐다.
파국만은 막는 게 낫다는 상호계산법에 따라 ‘상황 관리’를 위한 소통이 진행되고 있다. 해빙은커녕 돌파구도 없었던 미 국무장관의 지난달 방중에 이어 재닛 옐런 재무장관은 최근 3박4일간 총 10시간 중국의 새 경제팀과 회담하며 ‘탐색전’을 펼쳤다. 행간을 곱씹어봐야 하는 대목이 꽤 있었다. 과거 지도자급에서의 막말 대신 대화를 위한 멍석을 깔려는 의지가 역력했다. 정치인이 아닌 균형감각을 갖춘 경제학자인 ‘옐런 효과’로도 읽힌다. 주목할 만한 지점은 옐런 장관 입에서 나온 단어의 변화다.
미국 등 서구에선 ‘탈동조화(디커플링)’ 대신 ‘위험 제거(디리스킹·de-risking)’라는 유행어가 퍼졌는데 옐런 장관은 디리스킹에 무게를 두기보다는 ‘다양화하다(diversify)’라는 단어를 썼다. 공급망을 다양화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시장경제에선 위험을 감수하려는 의지가 번영을 주도하는데 디리스킹엔 ‘중국과 교역은 사업·투자 환경과 상관없이 본질적으로 위험하다’는 의미가 담겼다는 지적(칼 빌트 전 스웨덴 외무장관)을 옐런 장관이 인지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도 디커플링과 디리스킹이 사실상 차이가 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점도 고려했을 것이다. ‘다양화’엔 상대방을 해가 되는 존재로 보는 게 아니어서 협의의 여지가 녹아 있다.
옐런 장관은 중국 경제실권자인 허리펑 국무원 부총리에게 양국의 기업이 무역과 투자에 관여할 충분한 공간이 있다며, 특정한 경제 우려에 대해 직접 소통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리창 중국 총리에게도 ‘미국은 승자독식(winner-take-all) 접근이 아니라 두 나라 모두에 이익이 되는 공정한 규칙에 기반을 둔 건전한 경쟁을 추구한다’고 했다. 옐런 장관의 방중 기간에 미·중 모두 ‘회담이 솔직하고 건설적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두 나라는 핵심적인 분야에서 대결을 풀 마음이 없었다. 옐런 장관은 허리펑 부총리에게 미국은 국가안보를 지키기 위한 ‘표적 조치(targeted actions)’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의 첨단 기술 수출 억제 조치를 완화할 뜻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셈이다.
중국도 광물 수출 통제 조치를 하고 있음에도 허리펑 부총리는 국가안보를 일반화하는 건 정상적인 경제·무역 왕래에 이롭지 않다며, 옐런 장관에게 우려를 표명했다. 미·중 간 해빙을 위한 돌파구는 이번에도 나오지 않은 셈이다.
옐런 장관은 미·중 관계가 조금 더 확실한 기반 쪽으로 가고 있다고 총평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는지 보려면 몇 가지 가늠자가 있다.
우선 미·중 간 이슈를 다룰 상설 기구가 설치될 것인지를 봐야 한다. 특정 고위 공무원의 개인기로 난마처럼 얽힌 문제가 풀리기를 기대하는 시대는 갔다. 존 케리 미 대통령 기후특사가 중국을 찾을 예정이고, 상무장관도 베이징에 간다는 얘기가 있는데 각계 전문가가 참여하는 미·중 사무국을 통해 분쟁 해결의 길을 탐색하는 게 최선이라는 지적에 귀 기울여야 한다.
아울러 미·중은 ‘무역·기술·지리 전략’이라는 세 가지 유형의 경쟁을 분리할 필요가 있다. 국가안보 문제를 다루려고 무역정책을 무기로 쓰는 건 경제관계에서 상호이익을 감소시킬 뿐이라는 진단이다. 이에 따라 미·중은 불공정 산업정책 관행을 금지하는 새로운 협정을 체결해 위험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
이제 중요한 건 한국의 보폭이다. 미·중이 디커플링과 거리를 두기로 한 만큼 철저한 국익 기반 외교가 윤석열 정부에 필요해졌다. 첨단 분야에서 형성된 대치 전선이 여전하기 때문에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은 미·중의 눈치를 계속 봐야 한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만 해도 경제개발·환경보호 등의 프로젝트에 미·중을 참여시켜 소통공간을 열 카드가 있는데 한국엔 그런 유인책이 마땅치 않다.
현 정부는 그동안 중국 배제에 앞장서는 듯한 언행을 보였는데 이젠 뒤로 한발 물러나 있는 게 나은 국면이 됐다. 애덤 스미스가 ‘상호의존성이 부의 창출을 극대화한다’고 정리한 걸 미·중은 충돌의 벼랑 끝에 와서야 새삼 깨닫고 있다. 이미 한쪽 진영에 올인하고 있다는 이미지를 국제사회에 깊게 심어놓은 한국은 더는 실수해선 곤란하다. 미·중이 충돌하면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대재앙이 될 것이라는 관측 속에서 한국이 외교만큼은 잘했다는 자평을 하려면 로키(low-key·절제된 행보) 전략을 쓰는 게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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