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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증권가 ‘낡은 관행’에 선전포고…이복현의 ‘변법’ 성공할까 [홍길용의 화식열전]
KB증권 고객자산 거래 손실은
증권가 짬짜미 영업·거래 관행
부동산PF 만기구조 개선 적절
금융권 유동성 위험 살필 필요
금감원장 힘만으로는 부족할수
금융위 법·제도 정비 수반돼야

효공(孝公)이 즉위할 진(秦)은 당시 강국인 초(楚), 위(魏)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구현령(求賢令)으로 인재를 모집한다. 이때 등용된 이가 변법(變法)으로 부국강병을 주장한 상앙(商鞅)이다. 개혁은 늘 기득권을 위협한다. 그들은 상앙의 혁신이 탐탁치 않았다.

감룡(甘龍) : 지혜로운 사람은 법을 바꾸지 않고 다스립니다. 기존 법으로 다스리면 관리는 익숙하고 인민은 편안해 합니다.

두지(杜摯) : 지금보다 이익이 백 배가 더 나는 게 아니라면 함부로 법을 고치지 말아야 합니다.

상앙 : 뛰어난 행동은 세상의 비난을 만나기 마련이고, 남다른 생각은 일반의 비방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법을 만들고, 어리석은 사람은 법에 통제 당합니다.

효공 : 상앙의 말이 옳다. 변법을 시행하라.

KB증권이 회사 돈으로 고객자산을 매입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증권업계와 금융감독원이 정면 충돌할 듯하다. KB증권은 고객지원이라고 주장한다. 금감원은 금지된 거래로 의심하는 모습이다. 자본시장법을 읽어보면 손해배상은 합법일 수 있지만 손실보전이라면 위법이다. KB증권 주장대로 ‘지원’이라면 손해배상은 성립이 어렵다. 손실보전이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형 대상이다

이번 사건은 비단 KB증권만의 문제는 아니다. 증권가의 채권 파킹거래와 자전거래는 그동안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대한민국 수재들이모이는 금융위원회나 금융회사를 무시로 들여다보는 금감원이 이런 관행을 전혀 몰랐을 리 없다. 때로는 시장을 안정(?)시키는 역할도 했기에 ‘아는 사이끼리’ 일종의 관행으로 용인한게 아닐까? 검사 출신이지만 금융 이해도가 높은 이 원장이 취임하기 전까지는.

먼저 이번 사태를 요약해보자. KB증권은 법인 고객이 맡긴 돈으로 만기가 짧은 금융상품을 운용하면서 만기가 긴 채권도 포트폴리오에 편입했다.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서다. 만기불일치(mismatch) 전략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지난 해 하반기 금리가 급등하고 자금시장이 경색되면서 만기가 긴 채권을 제때 현금화해 고객에 돌려주지 못했다. 결국 KB증권은 하나증권 신탁에 맡겼던 회사 돈으로 그 채권을 매입한다. 이후 KB증권은 큰 규모의 평가손실을 인식한다.

KB증권은 왜 대규모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고객 자산을 매입했을까? 채권은 만기가 있다. 발행회사가 채무불이행에 빠지지 않은 한 만기까지 가지고 있으면 원리금을 회수할 수 있다. 회사채 부도 확률은 극히 낮다. 값이 하락한 채권도 시간이 지나면 최소 원금은 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KB증권이 입은 평가손실도 해당 채권의 만기에는 크게 줄어들거나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99번 동안 문제가 없었던 거래에서 발생한 단 하나의 문제로 금융시스템이 위기에 빠질 수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일단 돈을 빌렸다면 제때(만기) 갚을 준비를 해놓는게 상식이다. 회수가 불투명해질 수 있는 돈을 넣어놓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다. 이번 사건을 좀더 깊이 들여다보면 금융권 곳곳에 내재되어 있는 유동성 위험의 큰 빙산이 그 뿔(一角)을 드러낸 것으로 이해할만하다.

금융회사는 자본을 바탕으로 다른 이의 돈을 빌려오고 그 돈을 굴려서 돈을 번다. 돈을 싸게 빌려오는 게 중요하다. 만기가 짧은 채권은 금리가 낮다. 만기가 긴 채권은 금리가 높다. 회수 때까지의 시간가치 때문이다. 짧은 만기로 조달해서 만기가 긴 채권에 투자하는 차익거래(arbitrage)가 가능한 이유다. 만기불일치의 위험과 맞바꾼 수익이다.

사실 대부분의 금융회사 수익모델이 이에 기반한다. 은행은 요구불예금도 받지만 1~3년 짜리 저축성수신이나 은행채도 주요한 자금조달창구다. 그래도 조달기간보다 대출회수기간이 더 긴 만기불일치는 피할 수 없다. 최근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에서 유동성 위기에 구조적으로 약점이 있음이 드러났다. 일정한도까지 원리금을 지켜주는 예금보호 장치도 예금인출 사태를 막지 못했다.

수신기능이 없는 증권사들은 1년 미만의 기업어음(CP)이나 전자단기사채로 주로 자금을 조달한다. 만기 1년 이상의 회사채도 발행하지만 비용부담이 크다. 자기자본 6조원에 지난해 7700억원의 순이익을 낸 메리츠증권의 1년 짜리 CP 발행금리는 4% 초반이다. 자기자본이 2조원도 안되고 지난해 순이익이 2000억원에 불과한 전북은행의 1년만기 회사채 발행금리는 3.7%대다.

이 때문에 증권사들은 자산관리계좌(CMA) 모집이나 초대형투자은행(IB) 자격 획득에 적극적이다. CMA와 초대형IB의 발행어음은 자금시장 보다 싼 비용으로 자금을 모으는 수단이다. 하루짜리 환매조건부채권(RP) 매도가 증권사 핵심 조달 창구가 된 배경도 비슷하다.

금융시스템에서 유동성은 어마어마하게 중요하다. 유동성이 꼬이면 시스템 전체가 붕괴될 수 있다. 우리가 늘 숨을 쉬지만 5분만 산소공급이 끊겨도 치명적인 것과 같다. 유동성 위기란 빌린 돈을 갚아야 하는데 자산은 있지만 현금을 제때 구하지 못해 발생하는 위험이다. 돈이 다급하면 가진 자산을 헐값에라도 팔아야 한다. 이 지경이 되면 다른 자산의 가치에도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사실 금융위기의 대부분이 유동성 위기에서 비롯됐다. 주요국 정부가 금융회사의 건전성 뿐 아니라 유동성 비율까지 규제하는 이유다.

금융위도 2019년 비은행권의 유동성 위험을 분석한 자료를 발표했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과 증권사의 환매조건부채권(RP) 거래도 주요하게 다뤄졌다. 아주 짧게 줄이면 만기불일치에 따른 유동성 위기 발생 가능성을 경계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복현 금감원장도 지난 해 취임 직후 곧바로 이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하며 대비를 주문했다. 실제 부동산PF와 그와 관련된 증권사의 유동성 문제는 곧바로 현실이 됐다. 금감원은 지난해부터 이 문제를 주목했고 올해 현장 검사에 나섰다. 그리고 이번 KB증권 문제가 드러났다.

공교롭게도 금감원은 지난 24일 부동산PF 자금조달을 ABCP가 아닌 대출로 전환하도록 유도하기로 했다. 부동산PF 만기는 보통 1~3년인 반면 ABCP는 통상 1~3개월마다 지속적으로 차환이 이뤄졌다. 이렇게 되면 증권사들이 PF자금을 조달할 때도 사업장 만기에 맞춰 중장기로 빌려와야 한다. 이 원장이 취임 당시 제기한 핵심적인 문제해결을 위해 구체적인 행동에 들어간 것으로 보여진다.

전세계적으로 상당기간 높은 수준의 금리가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금리가 높으면 부실 위험도 커진다. 그만큼 금융시장의 변동성도 출렁일 수 있다. 건전성 관리 만큼이나 유동성 불안에도 잘 대비해야 한다. 하지만 금감원 검사와 그에 따른 제재만으로 유동성 불안 요인이 될 오랜 관행이 사라질 지는 미지수다.

현행 법체계를 보면 업계에서 이 같은 관행이 계속될 수 있는 여지가 상당하다. 금감원이 건별로 제재를 해도 업계가 행정소송 등으로 불복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워 보인다. 당장 고유자산과 고객자산 간 거래금지도 고객자산에 유리하다면 예외적으로 허용된다. 신탁이나 일임형랩어카운트는 시가평가가 아닌 장부가 평가도 가능하다. 고객자산을 매입한 것이 손실을 보전해준 행위인지에 대한 판단이 애매할 수 있다. 보편화된 장단기 불일치 운용전략을 금지하거나 줄일 구체적인 규제 장치도 정교하지 않다.

이 원장이 내년 총선에 출마한다면 관련 법령 정비를 추진할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시행령 이하 법규 제·개정권과 함께 전문성도 갖춘 금융위까지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시스템을 혁신하는 변법은 한 두 사람만의 노력으로 이뤄지기는 어렵다.

kyh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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