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자국 내 미국 반도체 판매를 금지할 경우 우리 업체들이 그 물량을 채우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미국이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고 한다. 이런 내용의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보도가 연일 논란이 되고 있는데도 한국과 미국 정부는 이를 부인하지 않고 있어 사실일 가능성이 커보인다. 그렇다면 미국이 중국과 벌이는 경제전쟁에 한국도 동참해달라는 노골적 주문인 셈인데 놀랍고 충격적이다. 아무리 한국과 미국이 동맹관계라고 하지만 이를 빌미로 개별 기업의 판로까지 간섭하는 것은 지나친 요구다. 동맹 간에도 지켜야 할 선이 있고 특히 시장경제원칙을 벗어나는 행위는 삼가는 게 기본이다. 공교롭게도 현재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을 국빈방문 중이라 이 문제가 현지에서 거론될 전망이다. 국익 차원에서 슬기롭고 당당하게 판단하고 대처해야 할 것이다.
미국과 중국 간 경제전쟁은 현재진행형이고, 그 중심에 반도체가 있다. 중국은 미국의 대중(對中) 반도체 제재에 맞대응해 ‘안보심사’를 이유로 미국 마이크론 제품 판매를 중단시키려 하고 있다. 그럴 경우 매출액의 4분의 1가량을 중국에서 올리고 있는 마이크론으로선 큰 타격이 불가피하다. 중국은 메모리반도체 3위인 마이크론을 배제하더라도 1, 2위인 한국의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있어 공급에 차질이 없을 것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땅한 대응수단이 없는 미국은 한국 기업이 그 자리를 메우지 못하게 해 중국의 조치에 제동을 걸려는 의도다. 그야말로 고래싸움에 새우등만 터지는 꼴이 됐다.
만에 하나 한국이 미국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지난 2016년 주한미군 사드 배치 결정에 따른 한국 제품 불매와 한류문화 금지 등 중국의 집요한 경제 제재를 경험한 바 있다. 이번에도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반도체의 중국 내 생산과 공급에 거친 제재 공세를 가할 것이다. 가뜩이나 세계적인 불황과 미국의 반도체지원법의 중국 배제조항 등으로 우리 반도체업체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여기에 추가적인 중국 보복까지 겹치면 한국 경제 전체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도 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미국이 한국 기업 피해에 상응하는 보상이나 정책적 배려를 해주는 것도 아니다. 한미 양국은 안보는 물론 경제 분야의 협력도 긴밀히 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개별 기업의 일방적 희생까지 강요해선 안 된다.
무엇보다 우리 정부가 단호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양국 간 우호 협력을 유지하면서도 현저히 국익을 침해하는 미국의 요구는 어떠한 형태로도 받아들여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