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18일 430억유로(우리 돈 약 62조원) 규모의 반도체 보조금을 쏟아붓는 ‘반도체법(Chips Act)’ 시행에 합의했다. EU 행정부 격인 집행위원회와 27개국을 대표하는 이사회, 유럽의회가 합의함에 따라 이후 반도체법은 유럽의회, 이사회 각각의 표결을 거쳐 시행된다. 지난해 8월 미국이 반도체 공급 독립을 선언한 데 이어 EU도 사실상 반도체 자립을 선언한 셈이다.
EU의 반도체법은 유럽이 보유한 연구·개발(R&D)과 제조장비 기술 강점에 생산역량을 높여 2030년까지 세계 반도체 생산시장 점유율을 기존 9%에서 20%로 확대한다는 로드맵에 바탕하고 있다. 애초 EU 집행위는 첨단 반도체 공장만 지원하려 했지만 세부 내용 협의 과정에서 첨단 기술뿐 아니라 구형 칩과 R&D, 설계 부문 등 반도체 공급망 전반으로 보조금 지원을 확대하기로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럽에 일단 반도체 공장을 짓도록 만드는 게 우선이라는 다급함이 실려 있다.
EU가 천문학적인 보조금을 내걸고 글로벌 반도체 경쟁에 뛰어든 데에는 각국이 반도체 지원을 퍼붓는 상황에서 손놓고 볼 수만 없다는 위기감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미국과 아시아에 대한 반도체 의존도를 줄이는 게 경제와 안보의 핵심이라는 데에 유럽이 인식을 같이한 것이다. 다만 공급망 중 얼마나 많은 부분을 EU로 이전할 수 있는지는 관건이다.
반도체 패권을 둘러싼 공급망 혈투는 EU까지 가세하면서 더 치열해지게 됐다. 각국의 셈법도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이번 반도체법안에는 역외 기업에 대한 명시적 차별 조항이 포함돼 있지 않아 우리에는 직접적 영향이 적다는 게 업계 판단이다. 기회요인도 있다. 국내 반도체 소재·부품·장비기업의 수출 기회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도 일단 선택지가 늘어난 모양새다. 미국이 반도체 보조금을 내세워 영업기밀에 해당하는 자료까지 요구하고 중국 투자가 상당 부분 제한돼 우리 기업으로선 독이 되는 딜레마 속에서 유럽의 등판은 또 다른 고려사항이 될 수 있다. 반면에 유럽은 반도체 수요처가 부족하다는 문제가 있는 만큼 이해득실을 꼼꼼하게 따질 필요가 있다.
반도체 지원법이라지만 자국 혹은 역내 반도체 경쟁력을 높이는 게 주 목적인 만큼 우리에게 유리하게만 작용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보조금 지급과 관련한 세부 사항이 나오지 않았지만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역할을 해야 한다. 독소 조항은 없는지 살피고 먼저 EU 당국과 협의해 우리 기업의 부담을 최소화하고 더 경쟁력을 높일 수 있도록 힘을 보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