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회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독일의 사상가 막스 베버(M. Weber)는 일찍이 현대 자본주의의 핵심 규범으로 ‘합리적인 자본회계’를 꼽았다.
실제 자본시장의 철학은 ‘규제(regulation)’가 아닌 ‘공시(disclosure)’에 있으며, 공시 기준의 표준화는 역사적으로도 자본 이동의 폭발적 확장과 세계 경제의 눈부신 발전에 일조해 왔다.
기업가치 패러다임이 전환되면서 과거 비재무적 요소로만 간주되어 왔던 ESG는 이제 지속 가능성 정보로 불리며 재무제표와 동등한 수준의 공시 대상으로 격상됐다. 자유로운 경영과 투자 활동의 보완재로서 ESG 공시 기준의 표준화가 불가피해진 것이 사실이고, 이를 위한 국제사회의 논의도 9부 능선을 넘은 듯하다.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가 개발 중인 ‘IFRS 지속 가능성 공시 기준’을 비롯해 EU의 지속가능성보고지침(CSRD),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기후정보 공시규칙이 최종 확정을 눈앞에 두고 있어서다. 이들의 공통점은 개별 기업에 생산 과정의 직접적인 탄소배출량(Scope 1)과 에너지 사용에 따른 간접적인 탄소배출량(Scope 2) 외에 공급망의 탄소배출량(Scope 3)까지 공시를 의무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환경, 사회, 지배구조 등 기업의 지속 가능 경영이 과실을 맺으려면 개별 사업장의 테두리를 넘어서 촘촘하게 얽힌 공급망 전체로 영향력을 확장해 나가야 함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관련 논의가 소비자와 투자자 관점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탓에 탄소 다배출 기업이 많은 제조업에서는 ESG 공시 기준이 규제의 변용으로 읽힐 소지가 크다. 최근 경총이 ‘ESG 경영위원회’ 멤버그룹을 대상으로 실시한 자체 설문조사에서도 80%가 Scope 3까지 포함한 정보공시 범위를 가장 부담스럽다고 답했다.
실제로 국내 1위 기업 삼성전자의 협력사만 해도 제조 분야는 2000개사, 비제조 분야는 1만개사가 넘는다고 한다. 철강업계 대표 기업인 포스코의 협력사도 2600개사에 달한다. 보통의 경우 1차 협력사를 넘어 2차·3차 협력사까지 내려가면 인식 부족과 비용 문제 등 다양한 이유로 ESG 경영을 엄두조차 못 내는 기업이 대다수다. 재생에너지 생산에 유리하지 않은 우리의 국토 환경까지 고려할 때 단순한 탄소배출량 정보 공개를 넘어 공급망의 넷제로 달성 여부까지 묻는다면 기업에 부여되는 그 책임은 너무나 가혹한 것이다.
이 밖에도 IFRS 지속 가능성 공시 기준 초안에 따르면, 기업은 기후 관련 위험 및 기회가 재무 성과와 현금 흐름에 단·중·장기적으로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 영향을 공시해야 한다. 기업마다 자체적으로 미래 예측에 기반하여 공개한 정보가 과연 이해관계자들에게 얼마나 유용성이 있을지 의문이다.
결국 글로벌 공시 기준은 각국의 다양한 상황을 반영해야 하는 만큼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담아내지 못한다. 이에 정부는 재량의 범위를 꼼꼼히 살펴서 보다 정교한 국내 공시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보고자 재량에 맡겨진 정보 공개 요구사항에 대해서는 업종별 선도 기업을 중심으로 데이터 분석기법이나 산출 방식을 자체 표준화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세계 조선업계 선두주자인 HD현대는 최근 국내 조선사 등과 손잡고 공급망 내 온실가스 배출량 측정 표준화를 위한 공동 개발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국내 표준을 세계 표준으로 만드는 야심 찬 계획의 시작인 것이다.
대전환기의 위험은 더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아무도 가보지 못한 땅에 떨어지는 느낌이랄까. 항공기가 불시착하기 직전 기장이 외치는 마지막 말이 있다. “Brace for Impact!(충격은 임박했고, 극복해야 한다).”
이동근 한국경영자총협회 상근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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