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4일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해 예상대로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했다. 과반 의석으로 입법권을 틀어 쥔 야당의 입법 독주에 맞서 대통령의 고유 권한으로 맞선 것이다. “정부가 법안의 부작용에 대해 국회에 지속적으로 설명했지만 제대로 된 토론 없이 일방으로 통과시킨 전형적인 포퓰리즘”이라는 게 윤 대통령의 입장이다. 민주당은 격하게 반발하며 거리로 나섰다. 야당이 방송법, 간호법, 노란봉투법도 강행 처리를 예고한 터라 강 대 강 대결 국면으로 정치 실종 우려가 크다.
쌀 초과 생산분을 전부 의무적으로 매수하는 내용의 양곡관리법이 문제가 많다는 건 알려져 있다. 매년 1조원 넘게 국민세금으로 사들여야 할 뿐 아니라 해마다 쌓이는 매수물량의 관리와 처분도 문제다. 이는 결국 쌀값 하락으로 이어져 오히려 쌀값 안정화를 해칠 수 있다. 식량 생산의 균형과 자급자족을 위해 타 작물 재배를 유도·지원해야 하는 정부 정책과도 어긋난다. 지금도 타 작물 재배에 지원금을 주고 있지만 쌀 농사로 옮기는 사례가 더 늘었다. 쌀 소비는 주는데 생산량이 갈수록 증가 추세다. 그만큼 기계화로 쉽고 안정적인 쌀 농사가 더 낫다고 농민이 판단한 것이다. 쌀 매수 강제는 다른 농업 부문과의 형평성 문제로 농민단체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다. 이 때문에 문재인 정권에서도 매수 의무화를 추진하지 못했다.
상황을 뻔히 아는 야당이 양곡법 개정안을 밀어붙인 저의가 의심받는 이유다. 대통령의 거부권을 유도해 이미지에 타격을 주고 농민의 마음을 사 내년 총선에 유리한 입지를 얻자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직후 민주당은 “이 정권은 끝났다”며 격한 반발을 쏟아냈고,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규탄시위도 벌였다.
야당과 제대로 된 협의조차 않고 손 놓은 여당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건의하겠다는 말만 반복할 뿐 대화에 나서지 않았다. 여야 조율을 통해 가장 합리적인 안을 도출해내야 함에도 집권여당의 역할을 방기하고 대통령에게 떠넘긴 거나 다름없다. 지금 노란봉투법 등 여러 개의 법안이 이런 식으로 입법 독주 대(對) 거부권 행사라는 악순환 정치에 처해 있다.
입법과 행정이 건건이 충돌하며 부딪히는 건 경기침체로 시름이 깊어지는 민생을 저버리는 거나 다름없다. 실제로 민생법안은 먼지만 쌓여가고 있다. 현 정부가 공식 출범한 뒤로 140건의 법안을 발의했지만 국회를 통과한 법안은 30여건뿐이다. 국민 삶을 옥죄는 법안 처리에 속도를 내야 한다. 여야가 한목소리로 외친 ‘일하는 국회’ 약속을 지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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