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제패권이 달린 반도체 전쟁에 ‘영원한 동맹’이 있을까. 미국이 최근 반도체지원법(이하 칩스법)의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의 세부 규정을 발표한 내용을 보면 이 같은 의문이 더 짙어질 수밖에 없다.
미국의 보조금을 수령하게 되면 향후 10년 동안 중국에서 실질적으로 반도체 생산능력 확장이 제한된다. 첨단 반도체는 5%, 범용 반도체는 10%까지만 가능하다. 중국 내 반도체공장의 첨단 장비 업그레이드 자체가 불가능해져 ‘전면 봉쇄’ 가능성까지 제기된 가운데 미국이 일정 수준의 ‘숨통’을 열어주긴 했다. 중국에 메모리반도체공장을 두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예상보다 다소 완화된 조건에 모두 한시름을 놨다.
그러나 큰 틀은 변하지 않았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글로벌 경제패권을 둘러싼 미-중 간 갈등은 앞으로 계속될 것이다. 미국은 지난해 10월 중국에 대한 첨단 반도체장비 수출 금지령을 내렸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오는 10월까지 1년 유예 조치를 받았지만 올해 연장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설령 1년 더 연장된다고 하더라도 시간을 번 것일 뿐 근본적인 불안정성은 해소되지 않는다.
국제정세 속 한국은 ‘샌드위치’의 운명이다. 외교안보 분야에서는 무엇보다 굳건한 한미 동맹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수출의 20%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최대 교역국인 중국에 등을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특히 반도체 분야에서 대중 수출 규모는 40%에 육박한다.
이럴 때일수록 기업들에는 실리적 행보가 중요하다. 지난 주말 베이징 중국개발포럼(CDF)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팀 쿡 애플 CEO 등 주요 글로벌 기업리더들이 참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팀 쿡 CEO는 “애플과 중국은 함께 성장했다”며 “양자관계는 일종의 공생관계”라고 강조했다. 미-중 갈등 속에서 미국의 대표 기업인 애플 수장이 이런 발언을 공개적으로 한 것은 외교보다 실리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만큼 중국은 기업들이 놓칠 수 없는 핵심 시장이란 의미다.
반도체산업은 미국, 한국, 중국, 일본, 유럽 등 주요국들의 전쟁터다. 돈이 걸린 소리 없는 전쟁에 영원한 동맹은 없다. 앞서 1980년대 중후반 승승장구하던 일본 반도체산업이 미국의 규제로 쇠락하기 시작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은 전 세계 반도체시장의 80%를 차지하며 미국을 위협했다. 그러자 미국 정부는 일본에 보복 관세를 부과하고 미·일 반도체협정을 체결하는 등 압박을 가했다. 지금 전 세계 10대 반도체기업에서 일본은 찾아볼 수 없다.
한국 스스로 반도체 공급망 역량을 키워야 하는 이유다. 삼성이 용인에 300조원을 투자해 세계 최대 반도체 클러스터를 만들겠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결국 믿을 건 ‘우리나라’뿐이기 때문이다. 특히 글로벌 경기가 불황일수록 전 세계 주요국의 ‘자국 중심주의’는 커진다. 격변의 시기인 만큼 자생력을 키우지 못하면 도태되는 건 한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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