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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VB 파산 ‘찐’ 원인은 유동성 관리 실패…은행에 엄격한 규제 필요한 이유[홍길용의 화식열전]
연준 긴축에도 장기채권 집중 투자
가격하락·만기불일치 위험 방치돼
뱅크런 이틀만에 현금자산 바닥나
韓은행 채권등 시가자산 보유 적어
금리변동 따른 평가손실 위험 낮아
집값 급락으로 대출부실 크면 문제

저축은행·레고랜드 사태 이미 겪어
비대면 보편화로 자금 이동 빨라져
건전성·유동성 더 엄격한 감독 필요
非은행 지급결제 허용에도 신중을

유동성 위기란, 제때 필요한 돈을 구하지 못해 발생하는 어려움이다. 아무리 땅이나 건물, 유가증권 등이 많아도 결국 거의 모든 거래는 현금이 기반이다. 필요한 현금을 충분히 가지지 못하면 거래상대방(counterpart)의 신뢰는 흔들리게 된다. 흑자 부도나 선물증거금추가납입 요구(margin call), 대규모 예금인출 사태(bank run) 등이 대표적인 유동성 위기의 사례다. 유동성 부족은 보유자산의 투매를 유발한다. 특히 그 주체가 시장의 주요한 구성원이라면 관련 자산군 가격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순식간에 진행되며 타격은 치명적이다. 유동성 문제는 1차적으로 경영진이 챙겨야 하지만 은행처럼 금융 시스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회사들은 정부나 중앙은행 등도 엄격히 감독해야 한다.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이 금융 시스템에 미칠 파장에 대한 계산들이 분주하다. 연방준비제도(Fed)의 긴축으로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진 미국 국채 가격이 급락하면서 은행들이 충분한 유동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불안이 확산된 것이 사태의 핵심이다. 일단 예금보호기구(FDIC)가 예금을 보증하고 연준이 은행이 보유한 채권 유동화를 지원하면 급한 불은 끌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미국 은행권이 유동성 문제에 얼마나 대비됐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커졌다. 지난해부터 연준은 강하게 긴축을 밀어붙였고 그에 따라 채권 가격은 급락했다. 채권에 대한 위험관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SVB는 이에 전혀 대비하지 않았던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미국 은행에 대한 감독권은 연준이 갖는다. 경영의 실패이자 은행 감독의 실패다.

이 때문에 다른 지방·특화은행들에서 비슷한 사태가 다시 벌어질 가능성도 존재한다. 만약 그렇다면 국채 비중 조정과 만기 불일치 해소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 단기간에는 어려운 작업이다. 일단 채권 가격 급락을 막기 위해 연준의 긴축이 중단되는 게 중요하다. 13일 미국 국채금리가 급락(채권 가격 급등)한 것도 이 같은 시장의 진단이 반영된 결과다.

당장 국내 은행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이다. 미국과는 은행의 영업 방식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융 시스템에서 유동성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자금 중개 역할을 하는 은행에 대한 관리·감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해준다.

미국 은행은 주로 고정금리로 대출을 해준다. 정해진 이자만큼 수익이 나오는 이 대출은 주택저당채권 형태로 시장에 팔린다. 모기지채권이다. 미국 은행들은 이로써 주택대출 회수 책임과 금리변동 위험은 피하면서 유가증권 등에 투자할 유동성을 확보하게 된다.

국내 은행은 주로 변동금리로 대출을 해준다. 대출 채권을 직접 보유해 회수 책임을 지지만 금리변동 위험은 대부분 차주에게 넘긴다. 그래서 은행보다 전당포에 가깝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미국 은행보다 채권 등 유가증권 보유 비중은 작다. 시가평가, 즉 자산가격 변동 위험에는 덜 민감하다.

SVB 사태는 은행이 보유한 유가증권(국채) 가격 하락으로 건전성에 문제가 생길 것이란 우려가 뱅크런으로 이어진 결과다. 국내 은행들은 미국 은행과 달리 대출에서 발생하는 부실 위험을 직접 부담한다. 담보나 보증 또는 매우 높은 신용등급을 요구하는 이유다. 대신 유가증권 보유 비중이 낮아 시가평가 부담이 적다. 국내 은행이 보유한 대출 채권은 유동화가 어렵다. 일단 뱅크런이 발생하면 현금을 구하기 어렵다.

이미 경험도 있다. 1997년 외환위기는 은행이 기업에 빌려준 돈을 제대로 회수하지 못하면서 부실화됐다. 결국 엄청난 공적 자금이 투입됐다. 기업이 떼먹은 돈을 국민이 대신 갚아준 셈이다. 2011년에는 저축은행 사태가 벌어졌다. 저축은행들이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에 빌려준 돈을 제대로 회수하지 못하면서 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가 터졌다.

은행에 문제가 생기면 결국 공적 자금이 투입돼야 한다. 관치 논란에도 은행에 강한 규제가 필요한 것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하다.

지금 우리나라 은행들의 아킬레스건은 주택담보대출로 연동된 집값이다. 담보인정비율(LTV)과 총부채권리금상환비율(DSR) 등의 규제 덕분에 웬만큼 집값이 하락해도 부실화될 위험은 낮다. 지난해 레고랜드 사태로 인한 회사채시장 대란에서 확인됐듯이 우리 금융 시스템의 유동성 위기는 비은행, 특히 증권사와 저축은행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대표적으로 조달하는 자금의 만기와 운용 만기가 잘 일치하지 않는 영업구조를 가지고 있다. 현재로서는 부동산PF 부실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은행은 아니지만 일단 금융회사가 무너지면 금융 시스템과 경제 전반에 미치는 파장이 엄청날 수 있다.

이번 SVB 사태가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중요한 교훈은 유동성 위험의 전개 속도가 과거보다 훨씬 빨라졌다는 점이다. 이제 더는 예금을 인출하겠다고 은행에 가서 줄을 설 필요가 없다. 스마트폰 클릭 몇 번으로 얼마든지 인출, 이동할 수 있다. 조금만 위험하다고 느껴도, 조금만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바로 자금을 옮길 수 있다. 아주 짧은 시간에 초대형 인출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최근 국내 금융당국이 은행의 과도한 이자 장사에 대한 대책으로 증권·카드·보험사에 종합지급결제 업무를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은행 수시입출금식 예금과 같은 계좌를 비은행회사에도 개설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다. 최근 은행들이 이자 장사로 큰돈을 번 데에는 급여이체통장과 같은 수시입출금식 수신이 늘어난 덕분이 크다. 정기예금과 달리 아주 낮은 이자만 지급해 저(低)원가성 수신으로 분류된다. 은행의 저원가성 수신의 독점을 깨면 계좌를 유치하기 위해 예금주들에게 더 많은 이자와 혜택이 부여될 수도 있다.

지급결제 계좌는 일종의 수신 계좌다. 그래서 은행에만 허용된다. 증권·카드·보험업권은 비은행에 지급결제가 허용되더라도 은행보다 큰 위험은 없을 것이라 주장한다. 자금 조달과 운용 특성상 비은행 회사들은 분명 은행보다 높은 리스크를 감수한다. 지난해 레고랜드 사태 때 증권사들이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던 점을 떠올려보자. SVB 사태로 은행의 유동성 위기가 얼마나 빨리 발생하고 확산할 수 있는지 확인됐다. 비은행회사가 수신 기능을 가지려면 은행과 동일한 수준의 규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이해가 된다.

kyh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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