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리의 역습이 시작됐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급격한 기준금리 인상 여파로 총자산 2090억달러(276조5000억원)의 미국 내 자산 순위 16위인 실리콘밸리뱅크(SVB)가 파산했다. 미국 스타트업과 VC(벤처캐피털)를 주요 고객으로 둔 SVB는 지난 40년간 실리콘밸리의 산파 역할을 해온 혁신금융의 상징이다. 이 은행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수년간 이어진 초저금리에 힘입은 IT기업들의 호황 덕에 대량 유치된 예금을 비교적 안전하다는 미 국채와 주택저당증권 등에 투자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을 선포한 Fed의 가파른 금리 인상에 따른 채권값 폭락으로 거액의 손실을 봤고 이에 놀란 예금자들의 예금인출(뱅크런)이 쇄도하면서 자금난에 빠졌다.
SVB의 파산은 미국 은행에서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 붕괴된 워싱턴뮤추얼은행(자산 3070억달러) 이후 최대 규모다. SVB가 유망 신생 기업들의 ‘돈줄’이었던 만큼 전 세계적인 스타트업업계의 유동성 위기로 확산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국내 투자자도 많은 게임플랫폼 로블록스는 30억달러의 보유 현금과 증권 잔액 중 5%가 SVB에 묶였다. 스타트업 4곳 중 1곳이 “급여도 못 줄 위기”라는 진단도 있다. 세계 금융시장에도 극도의 긴장감이 감돈다. 지난 9일과 10일 미국 은행주의 시가총액은 1000억달러 넘게 줄었고 비트코인 가격은 2만달러 아래로 무너졌다. 영국을 비롯한 SVB 해외 지점에서는 영업 중단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세계가 지금 미국 Fed,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그리고 조 바이든 행정부의 SVB 대책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미 연방정부가 SVB의 매각이 장기화할 경우를 대비한 안전장치로 예금보험 대상(계좌당 최대 25만달러)이 아닌 모든 SVB 예금을 보호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 중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은행들이 손실 없이 자산을 현금으로 바꿀 수 있도록 Fed의 대출기구인 할인창구 이용 조건을 완화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이는 SVB가 밀려드는 예금인출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대부분 국채로 구성된 자산을 어쩔 수 없이 헐값에 매각하는 바람에 초고속 붕괴한 일이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다. 미 금융당국의 발 빠른 대처로 SVB 파산의 충격파가 더 확산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스타트업에 특화된 SVB 파산이 15년 전 ‘리먼브러더스’ 사태처럼 글로벌 금융위기로 확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그러나 작금의 고금리는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 등 우리 경제의 취약한 고리를 언제 급습할지 모른다. 이번 일이 남의 일이 될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