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104주년 ‘3·1절 기념사’는 여러모로 생경하다. 우선 분량이 1300여자로, 전임 문재인 정부의 첫 3·1절 기념사(3281자)는 물론이고 역대 정부 기념사들과 비교했을 때도 가장 짧았다. 내용도 파격적이었다.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죄’, 강제징용·위안부 등 과거사에 대한 직접적 언급도 없었다. 대신 “3·1 운동 이후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일본은 과거의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로 변했다”면서 양국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후손, 강제징용 피해자, 위안부 할머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은 이제 침략자에서 협력파트너로 변했다”고 선언하는 것은 여론의 따가운 비판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당장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은 “3·1운동 정신 훼손” “대일 굴욕 외교참사” “일본의 침략을 우리 탓으로 돌리는 말투” 등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윤 대통령이 그럼에도 이 길을 자청한 이유를 기념사에서 엿볼 수 있다. “104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던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봐야 한다. 변화하는 세계를 흐름을 읽지 못하고 미래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다면 과거의 불행이 반복되는 것은 자명하다”는 대목이다.
지금 세계는 제국주의 국가들끼리 충돌한 20세기 전반이나 미-소 냉전이 이어진 20세기 후반 못지않은 지정학적 충돌이 눈앞에서 진행 중이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다툼과 미국 주도의 글로벌 공급망 재편 그리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지난 30년 이어진 세계화 시대는 쇠퇴하고 지정학적 위기는 고조되고 있다. 한미일 대(對) 북중러의 신냉전구도 속에서 북핵 도발의 강도는 세지고,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은 현존하는 위협이다. 세계화와 자유무역의 시대에서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했지만 진영과 동맹 중심의 블록화 시대의 도래로 새로운 생존법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일 공조는 우리의 안보와 경제 기반을 다지는 핵심축이다. 3자가 긴밀히 협력해야 국제무대에서 발언권도 커진다.
불행한 과거에 발목 잡혀 미래 번영으로 나아가는 길이 막혀선 안 된다는 데에 많은 사람이 동의한다. 그런데 일본과는 두 세대가 훨씬 지났는데도 진정한 이웃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제 한국도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미래를 살아갈 세대가 더 풍요로운 대한민국을 설계할 수 있도록 한일 관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한다. 윤 대통령의 3·1절 기념사가 그 물꼬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