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 외교부 장관이 18일 독일 뮌헨에서 열린 한일 외교장관회담 후 “일본 측에 성의 있는 호응을 위한 정치적 결단을 촉구했다”며 “(일본 측이) 기시다 후미오 총리에게 입장을 전하고 거기서 판단을 받을 것”이라고 밝혔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 해법 관련 한일 간 막판 최대 쟁점인 일본 피고 기업(미쓰비시중공업, 일본제철)의 배상 변제금 참여에 대해 기시다 총리가 결단해야 한다고 한국 정부가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처음이다. 외교당국 간 고위급 연쇄회담을 통해 집중 협의했음에도 견해차를 좁히지 못한 만큼 이제 이 문제를 한일 정상 간에 정치적으로 풀어야 하는 단계가 됐다는 의미다.
박 장관이 기시다 총리의 정치적 결단을 촉구한 배경에는 한국 정부가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9개월 동안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만큼 했으니 ‘일본도 관계 개선에 생각이 있다면 응당 답을 할 차례’라는 단호한 메시지가 깔려 있다. 한국의 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먼저 제3자 변제를 하고, 관련 일본 기업들의 자발적 기부 참여와 일본 정부의 사과 표명이 뒤따라야 한다는 게 우리 정부의 징용해법 골격이다. 징용 피해자와 유가족, 시민단체에 욕을 먹으면서까지 마련한 고육책이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강제징용 배상 문제는 모두 해결됐다’는 일본의 입장을 반영한 묘책이기도 하다. 기시다 총리도 이에 대해 긍정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교감의 폭을 넓히려 실무급·차관급에 이어 이번에 장관급 담판으로 합의를 이끌어내려 했지만 일본이 양보안을 내놓기를 꺼리면서 교착 상태에 빠진 것이다.
한일 외교장관회담이 열린 날, 일본 홋카이도 서쪽의 배타적 경제구역에 떨어진 북한의 ICBM(대륙 간 탄도미사일)은 동맹국인 한미일의 긴밀한 안보 협력 필요성을 보여준다. 사거리가 1만4000㎞ 이상으로 미국 전역이 사정거리에 든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미-중 패권다툼으로 한미일 대(對) 북중러 간 진영 대립은 더욱 고조되고 있다. 미국이 새로 짜고 있는 글로벌 공급망도 경제안보를 위협하는 요소다. 안보와 경제의 패러다임 재편을 독자적으로 헤쳐나가기엔 한일 모두 버겁다. 북핵에 가장 확고한 억제 수단인 한미일 동맹을 위해서도 한일은 불행한 과거를 딛고 미래로 가야 한다. 정밀부품·소재와 첨단 산업 공급망의 한일 경제 공조도 긴요하다.
피해국 정부가 내부의 부정적 여론을 다독이며 성의를 다하고 있는데 가해국 정부가 최소한의 정치적 부담도 지지 않겠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기시다 총리의 결단으로 한일 관계에 새로운 지평이 열리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