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라는 건 간단하다. 22명이 90분 동안 공을 쫓다가 항상 독일이 이기는 게임이다.” 영국 축구의 레전드 게리 리네커가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서독과의 4강전에서 패하며 남긴 말이다. 독일 축구가 연거푸 월드컵 16강의 문턱도 넘지 못하면서 이제 옛말이 됐지만 지금도 스포츠를 넘어 극강의 상대를 표현할 때 다양하게 변주돼 인용되는 말이다.
리네커의 명언을 패러디해 지금의 우리 정부·여당을 표현하면 “머리 좋다는 엘리트 관료들이 정책대결을 벌이고, 내로라하는 당권주자들이 죽어라 뛰어도 결국은 윤심(尹心)이 이기는 게임”이라 하겠다. 기재부가 수개월 전에 대통령실에 보고하고 여야를 설득해 어렵사리 국회를 통과한 반도체시설투자 세액공제율이 윤석열 대통령의 호통 한 번에 뒤집혔다(대기업 기준 8→15%). 내년 총선을 지휘할 당대표로 당심(나경원)과 민심(유승민)에서 앞선다는 후보들은 ‘모난 돌 정 맞는 신세’가 됐고 윤심을 업은 후보가 사실상 낙점된 상황으로 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경기 직전에 골대를 옮기고, 경쟁 후보에게 ‘제2의 이준석’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진윤 감별사’ ‘반윤의 우두머리’ 같은 퇴행적 공방도 벌어졌다. 급기야 비대위원장의 입에서 “대통령 공격 시 즉각 제재하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당내 민주화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간다.
벤투 감독의 빌드업 축구를 체득해 12년 만에 원정 월드컵 16강을 달성한 한국 선수들은 “이제 우리도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경기를 지배하며 매력 있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했다. 최후방부터 차근차근 공격루트를 만들어 최전방에서 득점확률을 높이는 빌드업은 한 마디로 과정을 중시하는 전략이다. 국민의힘이 내년 총선에서 매력 있게 이기려면 과정이 아름다워야 한다. 소장파, 중도개혁파, 여성 리더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후보가 더 나은 미래를 놓고 선의의 경쟁을 펼쳐야 컨벤션 효과를 낼 수 있다. 직전 전당대회에서 ‘30대 0선’의 이준석이 중도층과 MZ세대의 호응을 끌어내 다 죽어가던 보수진영을 회생시켰고, 이게 유력 대선주자였던 윤석열의 입당을 가능케 한 유인이 됐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지금 여당은 총선까지 가는 빌드업을 생략한 채 윤심 한 방으로 매듭지으려 한다. 운에 맡기는 예전의 ‘뻥 축구’로 돌아가겠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윤 대통령은 역대 정부가 ‘피하고 싶은 잔’이었던 노동·연금·교육, 3대 개혁에 승부를 걸고 있다. 하나라도 성공하면 역사에 남을 일이다. 그런데 모두 법 개정을 거쳐야 한다. 국회 권력을 쥔 제1야당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윤 대통령은 그럼에도 이재명 대표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는다. ‘범죄 피의자를 만나는 건 부적절하다’는 의중이 읽힌다. 그러는 사이 정치는 실종됐고 뭐 하나 되는 게 없다. 윤 정부가 발의한 법안 110건 중 15건만 국회에서 통과됐다고 한다. 축구로 말하면 문전을 향해 수없이 크로스를 올려도 골을 만들지 못하는 득점력 빈곤이다.
행정과 입법은 민의를 받드는 두 축이다. 이재명에게 ‘패스’하지 않고 ‘패싱’만 하는 단독 플레이로는 국정 성과를 낼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전쟁 중에도 협상은 한다. 사법적 판단은 법원에 맡기고 대통령은 정치를 복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