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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칼럼] 해방된 靑을 추앙하라

세계적인 패션전문지 ‘보그’는 제31대 미국 대통령 허버트 후버 재임 때부터 영부인을 표지모델로 세우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1929년 5월 11일 발행된 보그지에 실린 후버 대통령의 부인 루 헨리 후버의 흑백 사진부터 재클린 케네디, 낸시 레이건, 힐러리 클린턴, 미셸 오바마 등 역대 영부인이 백악관에서 포즈를 취한 다양한 사진이 공식 홈페이지에 실려 있다. 지난해엔 조 바이든 대통령의 부인 질 여사가 백악관 발코니에서 웃는 사진이 8월호 커버를 장식했다. 배경이 된 백악관 내부의 모습도 영부인 못지않게 독자의 관심을 끈다. 최고권력이 전유하는 공간의 상징성은 크다. 대한민국 권력의 중심이었던 청와대도 얼마 전 패션화보를 통해 내부 일부가 공개됐다. 하지만 보그의 사진들은 공개 이틀 만에 홈페이지에서 사라졌다. 화보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74년 만에 절대권력에서 해방된 청와대가 요즘 몸살을 앓고 있다. 금단의 영역이었던 청와대는 지난 5월 10일 새 정부 출범과 함께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면서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문화재청 등에 따르면 청와대 개방 100일 만에 160만명의 시민이 다녀갔다. 문화체육관광부는 600점이 넘는 미술 작품, 역대 대통령의 역사문화공간, 전통적 문화유산, 5만여그루의 수목, 문화재를 활용해 청와대를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조성하는 계획을 구상 중이다.

하지만 공간 활용에 대한 밑그림을 마련하지 못한 채 서둘러 개방하면서 곳곳에서 잡음이 터져 나왔다. 보물로 지정된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 앞에 놓인 기물을 파손한 혐의로 관람객이 경찰에 붙잡혔고, 한 가구업체가 청와대 본관 앞 대정원에서 촬영한 영상에 자사 소파를 내세우면서 상업적 활용 논란이 불거졌다. 문체부와 문화재청이 관리방안을 두고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 소통 부족, 주도권 싸움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보그의 한복 화보는 청와대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문화유산 방문 캠페인’과 협력한 이번 화보작업에는 한혜진, 김원경 등 톱모델이 참여해 한복을 재해석한 의상을 입고 청와대 본관과 영빈관, 상춘재 등에서 촬영했다. 이를 두고 “신선한 기획”이라는 반응과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이 맞섰다. “국가의 품격을 떨어뜨린다”는 지적도 있었다. 결국 문화재청장이 국회 상임위에서 “미흡한 절차가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겠다”고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러운 개방에 예상치 못한 논란과 실책들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유산 훼손의 위험성을 최소화한다면 다양한 문화적 활용과 변주는 시도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역대 대통령의 공간이라는 상징성에만 매몰된다면 지나친 엄숙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해 또다시 박제된 구중궁궐의 역사를 되풀이할 것이다. 오랜 시간 1인 최고권력만을 위해 자리를 내어준 청와대는 이제부터라도 모든 국민을 다 품에 안고 싶을 것 같다. 많은 이가 추앙하지만 아무도 찾지 않는 옛 권력의 공간이 아닌 수많은 문화유산으로 영감을 주는 이 시대 서민을 위한 쉼터가 되고 싶을 것 같다. 해방된 청와대를 마냥 추앙하기보다는 ‘국민과 함께’라는 대명제 속에 살아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시키길 기대한다.

anju1015@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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