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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읽기 - 황해창> 5월에 쓰는 말죽거리 이야기
어질고 재주있는 이들
모여 산 양재 말죽거리
어른들 흥청망청 술판
보고 배우는 10대들…


양재역 일대를 ‘말죽거리’라고도 한다. 몇 년째 이곳에 살면서 ‘양재(良才)’라는 지명에 늘 매력을 느낀다. ‘어질 량’에 ‘재주 재’로 사전대로라면 ‘좋은 재주’라는 뜻이다. 예로부터 어질고 재주 있는 이들이 많이 산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니 덩달아 기분 좋다. 그렇다면 말죽거리는? 조선시대 한양을 오가던 이들이 말에게 여물죽을 먹이며 쉬어 가던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란다. 또 인조임금이 피란 중에 허기지자 이곳에서 팥죽을 급히 구해 말 탄 채로 먹고 서둘러 떠났대서 그렇다고도 한다.

각설하고, 편리해진 교통 때문인지 요 몇 년 새 유동인구가 크게 늘면서 거리 풍경도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강남대로에서 도심형 고층빌딩들이 양재 네거리로 이어지더니 투박하나 소박하던 먹자골목이 영락없는 유흥가로 승급하고, 서민풍 주택 자리에 오피스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마실’ 개념도 이웃 정의도 엷어진다.

더 유감스런 것은 흥청망청 곤드레만드레 현상이다. 특히 등산복 차림의 군상, 정확히 말하면 장년세대들이 벌이는 술판 추태는 가관이다. 주변 등산하기 좋은 산들이 꽤 있는 탓이겠지만 정도가 심하다. 평일 이른 퇴근 무렵에도 때론 길바닥에 널브러져 고성방가를 해댄다. 산전수전 백병전까지 황당한 무용담에 핏대 세우고 고전군가에 고함도 지른다. 주변엔 학교도 꽤 있는 데다 서울~경기를 오가는 자식 같은 젊은이들이 좀 많은 곳인가. 지켜보던 한 노신사가 혀를 찬다. “저러니 백전노졸 얘기를 듣지. 쯧쯧.”

아니나 다를까. 몇 달 사이 말죽거리 먹자골목에 떼 지어 몰려다니는 중고교생들이 부쩍 눈에 띈다. 교복에 교복 같은 것에 외계인 복장까지 혼재한다. 노랑머리, 빨강머리도 보인다. 더러는 담배를 꼬나물고 침을 퉤퉤 뱉고 욕설은 예사다. 9할이 ×발, ×나, ×××야 등 ×연발탄인데 신기하게도 다자대화는 원활하다. “교실에서 물 먹다 엎질러 재수 없었다”거나 “어젯밤에 용돈 달래다 한 방 맞았다”거나 뭐 그런 얘기다.

7, 8년 전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가 있었다. 주연인 권상우 이정재 한가인, 그리고 조연들의 라이브 같은 연기력을 칭찬하자는 게 아니다. 학원 로망 액션물인지 아닌지도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이후 학교와 길거리에 패싸움이 풍성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려 한다.

오가며 방황하는 아이들을 보다 보면, 보고 배운 흔적이 너무 짙다. 사회가 ‘학교폭력’ 그 자체에만 매몰되다 보니 정작 청소년기의 ‘생활’, 즉 생태적 본능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굳이 윗물 논리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눈만 뜨면 싸움구경이다. 영화도 TV도 게임도 폭력이 난무한다. 이뿐일까.

그러고 보니 양재 말죽거리 그 어디에도 뜨거운 가슴을 식히고 달랠 만한 길거리 농구코트 한 조각 없다. 마을 어귀 작은 공원 놀이터. 밤 이슥하도록 그 녀석들이 질펀하게 놀고 나면 이튿날엔 틀림없이 경찰관 몇 명이 그곳을 지킨다. 그다음 어린이들이 재잘댄다. 이게 과연 정상적인 순환인가.

물론 이런 모습이 이 거리의 전부는 아니다. 구민회관 독서실을 연일 메우는 이들, 늘 진지한 표정의 젊은 IT족들, 지하 연습실에서 악기 연주에 열정을 불사르는 노신사들, 양재천을 수놓는 스포츠 애호가들도 숱하다. 이런저런 모습들이 한데 어우러져 삶답게 사는 그런 곳이 아쉽다는 말이다. 비단 말죽거리만의 사연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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