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시야 속에 갇힌 채
아웅다웅하기보다 저 멀리
하늘의 이치라도 상상하면
우리 인생 더 윤택해질 터
말로만 듣던 개기월식을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지켜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2011년 마지막 달 12월 10일은 기념비적 날이다. 그것도 공기 청정한 해발 700m의 강원도 대관령에서 마침 깨끗한 밤하늘과 더불어 너무 선명하게 뇌리에 찍혔으니 더 그렇다. 하지만 실상은 달 구경보다 눈 구경이 1박2일 여행의 당초 목적이었다. 이달 초 강원도 산간지역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대관령에도 누적량으로 1m 정도 왔다는데 이때까지 서울에는 한두 번 솜털처럼 날리다 만 게 고작이어서 원래 첫눈 내리는 날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만나기로 했던 많은 연인들이 고심했다는 이야기는 심심풀이 땅콩이다.
아무튼 이날은 영하 7도, 체감온도 20도 안팎의 매우 추운 날씨였다. 까마득한 초등학교 동기동창 3가구 6명이 눈 구경, 달 구경을 가자고 구(舊) 대관령휴게소 자리로 체인 감은 봉고차를 몰고 간 것까지는 좋았다. 생각에는 거기서 내려 얼마쯤 걸어 약수터까지 갔다오며 눈 구경과 달맞이를 할 참이었다. 그러나 막상 현지에서 차문을 열고 나와 보니 강풍에 눈보라가 심상치 않았다. 나처럼 약골은 날아갈 것처럼 휘청댔다. 약수터행 대신 보이는 대로 윈드 힐(바람의 언덕)이란 카페로 들어갔다. 밖이 추워 그런지 사방이 큼직한 통유리창인 실내가 의외로 따듯하고 안락했다.
각자 취향대로 커피 라떼, 녹차 라떼들을 시키고 잡담이 한창인 가운데 누군가 아, 저 달 봐라 소리를 외친다. 정말 둥근 보름달이 카페 창 너머 산등성이로 불끈 솟아오르고 있었다.주변 하얀 눈과 어울려 그 달은 한 폭의 그림으로 변한다. 동요 가사의 ‘이태백이 놀던 달’ 이전에 우리가 보기에 좋았다. “그래, 송년에는 달맞이가 제격이지, 신년에는 정동진 해맞이가 일품이고….” 한 친구가 입을 떼기 무섭게 또 한 친구는 제법 철학적 얘기를 꺼낸다.
“인도의 한 성인이 달밤에 길을 가는데 한 시인이 우물 속만 들여다보고 있었대. 그래 뭘 하는가 묻자 이 시인은 우물에 비친 달이 얼마나 멋있는지 눈을 뗄 수 없다고 대답했다는군.그래서 당신 목이 안 부러졌으면 고개 들고 하늘의 달을 보라고 야단쳤대지.” “야단친 이유가 뭐야?” “마음의 허상 대신 사실을 보라는 거야.”
두 친구의 이런 허접한 대화에 나도 비슷한 말로 응수한다. “강릉 경포대 호수에 달이 다섯 개 있다는 말 들어봤나. 호수 위에 뜬 달이 하나, 바로 옆 바다에 뜬 달이 둘, 하늘 가운데 진짜 달이 셋, 술잔 속에 비친 달은 넷,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그대 눈동자에 감도는 달이 다섯 번째 백미야.” 늙은 남편들 수다에 부인들은 그냥 달만 본다. 그러다 돌연 외친다. “어머, 달이 찌그러져요.”
그제서야 나는 이날이 개기월식인 줄 알아챈다. 9시45분에 시작한 월식 현상은 우리가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해먹고 바둑을 두며 베란다 창문으로 흘끔흘끔 내다보는 동안 줄곧 계속됐다. 그러다가 마침내 달이 완전 실종되었는가 싶더니 서서히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규칙적인 자연현상이지만 참 신기하다. 우리 인생은 자식대로 이어질 뿐 사라지면 그만이다. 기독교적 부활은 영적 되삶이고 보통의 이승생활과는 별개다. 그렇다면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 잘 사는 것이 최선 아닌가. 돈과 명예, 권력 따위 종말에 무슨 소용 있는가. 키플링 시인 교사의 “카르페 디옘(이 순간을 즐겨라)”을 기억하며 우리는 며칠 안 남은 신년 해맞이를 약속하고 꿈속으로 빠진다.
소년 시절 땅을 보고 걷다가 돈 몇 푼을 줍고 나자 일생을 땅만 보며 거지처럼 살았다는 미련한 사람의 우화가 꿈속 내용이다. 새해에는 더 달과 별, 해를 올려다보며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