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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린 ‘모시 하는 여자’ …한산에 시집온 ‘복’이지.”
충남 서천군 한산면에 위치한 한산모시홍보관은 작은 ‘민속촌’이다. 전수교육관, 전통공방, 길쌈놀이 전수관 등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홍보관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문헌서원, 동남쪽으로는 또 다른 지역 특산물인 소곡주를 만드는 공장이 있다.

최근 줄타기ㆍ택견과 함께 유네스코 인류무형자산에 ‘깜짝’ 등재된 ‘한산모시짜기’ 덕에 평일 오전임에도, 공방 근처를 기웃거리는 관광객들이 꽤 된다.

공방 안을 빼꼼히 들여다본다. 검은색 치마에 하얀 모시저고리가 곱다. 까칠한 입술에 닿았던 모시풀이 한 올 한 올 쪼개진다(모시 쪼개기). 훌러덩 치마를 걷어올리고 쪼갠 모시올을 무릎에 비빈다(모시 삼기). 창피할 것도 없다. 우리 어머니도, 또 그 어머니의 어머니. 늘 그렇게 모시를 삼았다.

‘한산모시짜기’ 기능보유자, 평균 경력 30년의 강철 여인 셋을 만났다. 은퇴한 문정옥 선생의 뒤를 이어 중요무형문화재 14호에 등록되어 있는 방연옥(여ㆍ64) 씨와 제자 박승월(여ㆍ60) 씨, 고분자(여ㆍ56) 씨다.

“아유, 뭔 소리래, 이건 맨바닥에 앉아서 해야 하는 거구먼.” (고분자ㆍ이하 ‘고’)

마룻바닥이 차가우니 방석을 깔면 어떻겠냐는 기자의 주문에 정색을 한다. 한산모시조합에서 규정한 모시 제작과정은 총 8단계. 고분자 씨는 이 중 세 번째 단계인 모시 삼기 중이었다. 손바닥에 침을 발라 한 모시 머리쪽과 다른 모시 올의 아래쪽 끝을 연결해 허벅지나 무릎에 대고 비빈다. 평평한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야 가능한 작업이다.

“다 삼아서 한 뭉치가 되면, 열십자 모양으로 매어놓고 다시 삼는 거지. 계속 침을 발라가며 하니까, 입이 바짝바짝 마르기도 해. 그래서 옛 어른들이 모시 한 필에 침이 석 되 들어간다고 하셨나벼.” (고)

방연옥 씨의 또 다른 제자 박승월 씨는 모시를 쪼개는 중이다. 입술과 윗니를 이용한다. 며칠 동안 밤낮으로 표백ㆍ건조 과정을 반복해 탄생한 태모시를 물에 적셔, 더이상 가늘게 만들 수 없을 때까지 쪼개는 게 관건. 


“입술 부르트고, 피나고…배울 때 그 고생은 말도 못하지. 앞니가 썩어 조만간 치과에 가야 하는데, ‘모시 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알아서 잘 만들어 준다는구먼.”(박승월ㆍ이하 ‘박’)

예부터 품질 좋은 모시로 유명한 한산 지역에선 ‘모시 하는 여자’들을 위해 치과에서도 신경을 쓴다. 모시를 쪼개려면 앞니를 이용해야 하는데, 이때 불편함이 없도록 만들어 주는 것.

무형문화재 방연옥 씨는 베틀을 잡았다. 이는 가장 마지막이자, 새로운 여정의 첫 단계다. 태모시를 쪼개고, 삼고 나면 모시 날기, 바디 끼우기, 모시 매기, 꾸리 감기의 지난한 과정을 거친다. 그 이후에야 누구나 쉽게 떠올리는 바로 그 장면이 시작된다. 다 맨 모시 올을 베틀을 이용해 짠다. ‘제직’ 작업이다.

“이제부터 밤낮 쉬지 않고 일해야, 모시 한 필(약 21m) 나올 때까지 꼬박 석 달이 걸려. 그러니, 이걸 누가 하려고 하겠나…. 우리야 뭐, 한산으로 시집온 죄로 이러고들 있는 거지, 안 그래?” (웃음) (방연옥ㆍ이하 ‘방’)

그들에게 모시는 그저 삶이었다. 요즘엔 7살 되면 한글부터(혹은 영어부터) 배우지만, 그들은 모시 짜는 것부터 배웠다. 낮에는 밭을 매던 어머니는 밤이 되면 모시를 짰다. 꾸벅꾸벅 졸면서 혼나기도 많이 혼났다. 특히 ‘모시 매기’를 배울 땐 울기도 많이 울었다.

“이게 제일 어려워. 여기서들 많이 포기하지. 나중에 짤 때 이음새를 매끄럽게 하기 위해 콩풀을 먹이는 거야. 마당에 불 피워서 은근히 말려야 하는데, 날실이 날아가지도, 서로 들러붙지도 않게 하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녀….”(방)

“옛 어르신들이, 모시 매면서 속이 다 까맣게 탄다 그랬잖여요.” (고)

베틀을 쓸 땐, 온 몸을 쓴다. 지그재그로 바디를 옮기고, 북을 위아래로 당기면서 발도 움직인다. 그러다 보니 온몸이 파스 투성이.

입술엔 굳은살이 생겼고, ‘모시 하기’ 편하게 이도 새로 해 넣었다. 그렇게 30년을 꼬박 속을 태웠다. 이쯤 되면, 세계유산이니 하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여성노동 착취사로 여겨질 법도 하다.

한산 지역에 시집와서, 이곳의 삶을 배웠다. 모시를 짰다. 여인에서 여인으로 전수되던 전통문화를 지켰다. 있는 그대로, 유네스코 인류무형자산이 됐다.

“축하 전화 말도 못허게 왔지…. 서울에 있는 자식들이 ‘축하해유’ 하는데, 도통 뭔 소린지도 몰랐어. 나중에 텔레비전 보고 알았어.” (박)

사실 뭔지 모르겠다. 그저, 좋은 거라니까 좋다. 한산의 것이 한국의 것이 되었고, 그게 또 세계의 것이라고 한다. 특별히 손에 잡히는 일도 아니지만, 마냥 좋다. 


“후계자나 많이 생겼으면 좋겄어. 너무 힘드니까, 나라에서 지원을 해줘도 5~6년에 1, 2명 나올까 말까야…. 이틀 해보고는 입에서 피나니까 무서워서 다들 도망가곤 해….” (방)

서천군에서는 전통방식의 ‘한산모시짜기’ 기능인을 키우기 위해 1년에 5명씩 지원을 한다. 4년 전부터 시작된 이 프로그램을 통해 현재 3명이 꾸준히 전수를 받고 있다. 하지만 올해는 단 한 명도 지원하지 않았다.

“고생한 거에 비해 돈이 안 되니까 그런가벼. 2000년대 초반까지는 모시가 참 잘 팔렸는데, 중국게 들어오고선 힘들어졌지….” (고)

숙달된 기술자가 3~4개월을 꼬박 매달려야 한복 한 벌이 나온다. 남성 상의 한 벌이 70만~80만원선. 쏟아부은 정성과 노력에 비하면 비싼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서민들이 척 하고 사입기엔 부담스럽다.

그래서 서천군은 건양대, 충남방적과 함께 천연모시로 만든 실의 대량 생산을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현재 충남방적이 보유한 시스템으로는 하루 18t의 모시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서천에서 1년에 생산되는 천연 원료는 15~20t. 농가 소득 향상에 기여하고 있는 모시 재배지를 늘리고, 솜 상태를 만드는 기술개발이 관건이다. 30년을 베틀과 싸워온 철의 여인들에게 넌지시 이야기하니 눈이 커진다.

“워매, 그게 어디 공장에서 되겄어? 모시는 워낙 섬세해서 사람 손 아니면 안 되는 법인데….” (방)

유네스코 지정으로 한산모시의 대량생산과 명품화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국가적인 지원이 힘을 받고 있다. 더군다나 내년은 수의가 많이 팔린다는 윤년이다. 수의로는 안동삼베가 유명하지만 모시도 수의로 많이 쓰인다. 되레, 삼베보다 ‘한 단계 위’라고도 한다.

‘내년에 대박 나겠다’고 운을 띄우자, 스승ㆍ제자 할 것 없이 순박한 시골 아낙네로 돌아가 한바탕 웃음꽃이 핀다.

“모시는 흙속에서 완전히 썩거든. 아유, 내년에 정말 대박 좀 났으면 좋겠구먼.” (웃음)

<박동미 기자@Michan0821>
/pdm@heraldcorp.com 


[사진=김명섭 기자/msiro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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