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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심한 듯한 세상의 풍경.. 최진욱표 ‘격정의 리얼리즘’
최진욱(추계예술대 교수,55)은 우리 미술계에서 몇 안되는 리얼리즘 화가다. 그러나 그의 리얼리즘은 조금 다르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리얼리즘을 풀어간다. 미술평론가 심광현은 그의 리얼리즘을 ‘격정적 리얼리즘’으로 칭한다.

화가는 많아도 ‘좋은 그림’, ‘생각에 빠져들게 하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드문 상황에서, 실력있는 작가로 꼽히는 그가 서울 신문로 일민미술관(관장 김태령) 초대로 개인전을 개막했다. ‘최진욱-리얼리즘’이란 타이틀로 지난 13일 시작된 전시는 기량 뛰어나고, 문제의식 있으며, 작업도 독특하지만 일반에겐(특히 유명작가만 선호하는 국내 미술시장에선) 별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진면목을 확인해볼 수 있는 자리다.

최진욱의 그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젊은 시절 자전거라는 사물을 시작으로 화실풍경, 수업풍경, 동네풍경, 경복궁, 상해임시정부 등을 그렸다. 누구나 접하는 풍경들이다. 그런데 그의 그림은 대중적 기준으로 접근한다면 썩 잘 그린 풍경은 아니다. 선은 거칠고, 터치는 정교하지 않다. 도무지 어울릴 것같지 않은 장면들이 한 화면에 함께 들어차 있기도 하다. 편한 그림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같은 그림은 회화의 종말인가? 회화의 회복인가? 그도 아니면 무엇일까? 


이처럼 최진욱의 회화는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한다. 알쏭달쏭하다. 그는 그림을 통해 개인과 사회의 경직된 사고체계를 흔들어, 이를 보다 다채롭고 변화무쌍하게 전환시키고 싶어한다.
전시에는 작가 삶의 터전인 서울 북아현동(직장인 대학이 있는 곳)을 그린 신작들과 함께 그가 회화 본질의 유연함과 사고의 유연함을 추구하며 고뇌했던 흔적들을 보여주는 작품이 두루 나왔다. 또 자신의 모습을 화실공간, 깨진 거울 속에 투영시킨 독특한 형식의 자화상까지 내걸려 최진욱의 회화적 서술방식의 변화과정도 볼 수 있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은 구작과 신작이 망라됐다. 과거작 중에는 ‘할아버지 말씀’(1991), ‘아침이슬’(1993), ‘동북아문화-정체성’(1997)처럼 이데올로기적 개념이 드러나는 작품이 아닌, 상대적으로 무심(無心)한 듯한 작업이 주로 선정됐다. ‘연희동 습작’(1991), ‘서울의 서쪽’(1994), ‘제부도’(1996), ‘나의 생명’(2004) 등이 그 예. 아울러 섬세하면서도 밀도있는 드로잉들과, 자화상 작업을 연대기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최진욱의 ‘기술(記述)적 변화’도 한자리에서 조망했다. 김태령 관장은 “최진욱에 대한 기존 미술계의 경직된 평가에서 벗어나, 작가가 회화 본질의 유연함, 사고의 유연함을 얻기 위해 노력했던 여러 흔적들을 보여주는데 촛점을 맞췄다”고 밝혔다.

최진욱의 그림은 대체로 무심하다. 무심한 초상이자, 무심한 풍경이다. 무심한 작업이지만 현실의 정수가 풍부하게 담겼다. 회화에 드리워진 감성적인 공기 사이로 사회적 리얼리즘이 오롯이 잠재돼 있다. 목청 높여 문제의식을 드러내진 않아도 그의 심상찮은 그림 저변에는 우리의 초상과 우리의 실존이 탄탄하게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 그리고 그 연장선에 그의 신작 ‘상해임시정부’, ’북아현동’ 이 있다. 신작들은 작가가 꿈꾸는 ‘깊이있는 미(美)적 드러냄’을 보다 활기차게 드러내 주목된다.


서울대 미대와 워싱턴DC의 죠지워싱턴대학원을 졸업한 최진욱은 지난 25년간 민중미술 진영에도, 모더니즘 진영에도 속하지 않은채 독자적 행보를 걸어왔다. 미술계의 트렌드나 시장의 열기에 아랑곳 없이 리얼리즘으로 모더니즘을 말하고, 모더니즘으로 감성을 추구해왔다.

미술평론가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최진욱은 예술과 사회, 예술과 정치, 추상과 구상, 생태주의와 현실참여 속에서 지그재그 운동을 반복했다. 동일한 듯 보이지만 동일하지 않은 반복을 통해 변증법적 변화가 생겨나는 과정, 이를 통해 최진욱 고유의 리얼리즘이 형성된다”고 평했다.

최진욱은 가슴 꽉 채우며 다가오는 세상의 리얼리티들을 물고기 낚듯 신명나게 건져올리며 ‘그림의 시작’을 알렸다. 그의 감성적 리얼리즘, 신비하고도 과학적인 그림들은 그렇게 닻을 올렸다. 하지만 그 대담한 선언(1991년 개인전) 이후 최진욱이 우리 앞에 드러냈던 ‘놀랍고도 생생한 느낌’은 잠시 주춤하며 잊혀져가는 듯했다. 한동안 회화와 생활 사이의 괴리, 그로부터 발생하는 정신적 감성적 황폐감을 겪은 작가는 그러나 요즘들어 우리 사회의 일그러지고 찢겨진 리얼리티와 다시 대면하며 이를 화폭에 담아내고 있다. 성실하고도 끈질긴 통찰의 궤적들이 그만의 방식으로 켜켜이 쌓여가고 있는 것.

최진욱은 한 평면에 어긋난 프레임들을 연속적으로 배치하거나 일그러진 몽타쥬를 시도하곤 한다. 그런가 하면 애써 잘 그린 그림 위에, 큰 붓으로 느닷없이 ‘일격(stroke)’을 가하기도 한다. 숨 가쁘게 멋진 그림을 완성해놓곤, 종국엔 굵은 붓으로 ‘그림을 훼손(?)하는 건 아닌가’하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이에따라 그의 그림의 주체는 작가 자신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세계의 만남을 모색한 화가의 통일된 인격 속에서 ‘강한 대비를 이루는 모순된 세계’인 듯하다. 심광현 교수는 이에 대해 “(최진욱의 회화는) 서로 대립하는 두 세계간의 변증법적 과정 속에서 출현하는 격정적 리얼리즘(passionate realism)”이라고 평하고 있다. 최진욱의 일민미술관 전시는 오는 11월 27일까지 계속된다. 관람무료. 02)2020-2060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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