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인들은 비를 맞지 않는다. 마천루 빌딩 숲의 빌딩과 빌딩을 이어주는 원통형의 가교 ‘스카이 워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홍콩경제는 1970년대 이래 한번도 위기다운 위기를 맞은 적이 없다. 아시아 경제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1997년 외환위기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도 홍콩을 불안에 떨게 하진 못했다. 홍콩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스카이 워크와 같은 ‘든든한 금융’이 있었기 때문일 지 모른다.
88층 높이의 국제금융센터(IFC), 홍콩증권거래소, 세계 유수의 금융회사들이 포진해 있는 홍콩 금융 중심가 센트럴에는 오늘도 각양각색의 인종들이 금융을 하기 위해 모여든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 수는 기회의 땅 홍콩에서 페라리와 람브르기니, 벤츠, BMW의 주인이 될 꿈에 부풀어 있다.
▶아시아금융 허브 홍콩=1800여개 금융회사가 자웅을 겨루는 곳. 서울 면적의 1.8배에 700만 인구가 사는 도시에 존재할 금융회사 수로 믿기엔 과분할 만치 많다. 이들 회사중 외국계 은행은 180여곳이고, 세계 100대 은행에 속하는 글로벌 금융회사만도 69곳에 이른다. 홍콩이 아시아금융의 중심지로 자리잡게 된 역사는 길지않다. 1960년대까지도 소규모 지역금융센터에 불과했다. 홍콩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말부터이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계기로 금융시장도 빛을 보게 됐다.
홍콩 정부는 금융중심이 되기 위한 다각적인 전략을 마련하고, 금융과 조세제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글로벌 금융회사들을 불러모으기 위한 조치였다. 이를 통해 홍콩은 마침대 1980년대들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국제금융의 중심지로 도약한다. 홍콩이 국제금융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많다. 미 달러화와 연계된 고정환율제(미화 1달러 당 7.75~7.85 홍콩달러)를 채택해 환율이 안정적이고, 외환거래에 대한 규제가 없어 투자자들의 신뢰를 사고 있다. 시장참여자의 다양한 금융활동 기회를 보장하고, 원하는 인력을 합리적인 임금으로 고용하거나 회사형편에 따라 쉽게 해고할 수 있도록 한 것 역시 성장 배경이 됐다.
이와함께 금융투자를 저해하는 조세부과를 없애고 세율(법인 16.5%, 기타 15%)을 낮춰 투자자 수익률 제고에 도움을 주는 한편 외국인이 생활하기에 편리한 환경을 조성한 것 또한 성장 비결로 꼽힌다. 싱가폴과 상하이가 아시아 금융허브 지위에 도전하고 있지만 홍콩은 아직 건재함을 과시한다. 중국대륙과 세계를 연결하는 관문으로서 새로운 역할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해 도입된 중국의 위안화 대출규제(예금대출 총량규제)는 홍콩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중국대륙 진출 기업의 역외대출 수요는 홍콩을 노크하고 있고, 홍콩의 지위는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아울러 이슬람 금융시장과 상품선물시장을 형성하려는 홍콩 정부의 구상도 현실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평가이다.
▶외환위기와 권토중래(捲土重來)=홍콩이 아시아를 대표하는 국제금융의 중심지로 도약하면서 한국 금융회사들은 앞다퉈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홍콩은 글로벌 금융시장으로 나아가는 일종의 관문이자, 시험대로 간주됐다. 이로 인해 1997년 외환위기 직전까지 현지에 진출한 국내 금융회사는 은행 27곳, 증권 9곳, 자산운용사 2곳, 보험 3곳, 종금 11곳, 리스 15곳 등 모두 82곳에 달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는 홍콩 철수의 도화선이 됐다. 외환위기로 경영난에 봉착한 국내 금융회사들이 썰물처럼 홍콩을 빠져나갔다.
이로 인해 2004년 현지 법인 및 지점수는 이전의 30% 수준인 23개로 줄었다. 쪼그라들던 홍콩사업에 변화가 생긴 것은 지난 해부터이다. 작년 한 해 동안 증권사 3곳, 자산운용사 1곳 등 모두 4곳이 문을 열면서 현지 진출 금융회사 수는 28곳으로 늘었다. 올들어서도 신한BNP자산운용이 신규 진출해 2월 말 현재 진출 기업수는 29곳에 달한다. 외환위기 때 폐퇴했던 세력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딛고 힘을 되찾아 다시 전장(戰場)에 임하는 모양새다.
오용석 금융감독원 홍콩사무소 수석조사역은 “아시아 금융의 허브인 홍콩에 본거지를 두고 중국 진출의 교두보로 삼으려는 금융회사들이 최근 늘고 있다”고 말했다.
▶한계...그리고 변화의 조짐=외환위기 당시 수많은 한국 금융회사들이 패퇴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다. 자본력 등 변변한 능력도, 수완도 없었기 때문이다.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를 바 없다. 은행 영업의 대부분은 본점을 위한 외화자금 조달, 국내기업과 교민을 상대로 한 무역금융과 대출, 신디케이션론 등과 같은 전통적인 금융서비스에 그치고 있다. 증권이나 자산운용사의 경우에도 일부 회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해외투자자 대상의 국내 주식 매매중개 위주의 영업을 하거나 국내 모회사의 운용자산을 위탁받아 운영하는 단순한 형태의 영업을 위주로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같은 근본적인 이유는 홍콩에 기반을 두고 있는 글로벌 금융회사에 비해 자본력과 전문인력이 부족하고, 평판에서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다행스런 것은 이같은 행태에 서서히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은행 홍콩지점은 조달 비용을 줄이기 위한 일환으로, 현지 예금유치에 발벗고 나서 과거 ‘제로’ 수준이었던 예금잔액을 2억5000만 달러로 불렸다. 현지 동남아계 은행과 네트워크를 강화해 6500만 달러 규모의 국내 기업 차입을 성사시키는 등 신디케이트 어레인저로서 역량도 발휘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자산 7억달러에 불과한 이곳은 2008년 860만 달러의 영업이익을 올린 데 이어 2009년 1300만달러, 2010년 2100만 달러 등 연 평균 56%의 이익신장률을 기록중이다. 김열홍(45) 하나은행 홍콩지점장은 “착실히 실적을 쌓아 글로벌 금융회사에 견줄만한 자금중개자로 역할하는 게 목표”라며 “국내 대기업의 자금조달을 직접 중개하는 게 단기목표”라고 말했다. 수출입은행 홍콩법인은 열악한 자본에도 불구하고 저리 자금 유치와 본점 연계지원 등을 통해 국내 기업의 수출금융 지원 금융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권두환 수출입은행 홍콩법인장(부행장)은 “자본금이 3000만 달러로 10여년 전이나 같지만 저리 자금조달과 적기적소 대출 지원, 우량회사채 투자 등의 유동성 관리를 통해 경영을 효율화하는 데 힘쓰고 있다”고 밝혔다. 해외에서 재보험을 유치하는 실적이 전체 매출의 20%를 차지할 만치 국내 금융회사 중 가장 국제화기준에 충족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코리안리 역시 현지에서 괄목할 만한 경영성과를 거두고 있다.
코리안리 홍콩법인은 재보험 중개를 통해 지난 해 2000만 홍콩달러 규모의 수수료 수입을 올린 데 힘입어 1440만 홍콩달러 상당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이는 5년 전 이 부문 이익 541만 홍콩달러의 3배에 육박하는 것이다. 이인재 홍콩법인장은 “아시아 제일의 재보험회사에 걸맞는 네트워크구축이 이같은 실적의 비결”이라며 “30개국 90여개 보험사와 재보험거래하고 있다”고 밝혔다.
홍콩지점을 통해 지난 해에만 2800만 달러 규모의 업무이익을 올렸던 외환은행도 2009년 7월 투자은행(IB) 사업 특화를 위한 별도 법인을 설립해 유가증권 발행, IPO(기업공개) 시장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손창섭 외환은행 IB법인 대표는 “인내심을 갖고 서서히 역량을 보여주는 것이 이 시장에서 성공하는 길이라고 믿는다”며 “무엇보다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데 주력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윤재섭기자/is@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