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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동운동가 출신 부인이 털어놓은 김문수는?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과거 노동운동의 동반자이며 현재 정치적 반려자, 인생 동지라 일컫는 아내 설난영씨가 자신의 남편 김문수 도지사를 향한 존경의 글이 화제다.

지난 12일 김 도지사의 블로그에는 아내 설난영씨의 “남편 김문수, 한 인간으로서 존경”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이 글에는 김 도지사와의 첫만남부터 암울한 시대 함께 노동운동을 하며 쌓았던 동지애, 정치가로서의 김 도지사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김 도지사와 아내 설난영씨는 70년대 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노동운동가로 경찰의 수배, 구속, 고문, 석방 등 마치 드라마 속 이야기같은 인생역정을 함께 나누며 만나 서로의 반려자가 되었다. 

설난영씨는 노동운동을 하는 배짱좋은 남자와 결혼해 김 도지사가 서울구치소, 안양교도소, 목포교도소, 광주교도소 전국을 이감 당하며 2년 6개월만에 수감생활을 끝내고 개천절 특사로 출소할때까지 김 도지사의 옥바라지를 하며 서점에서 장사하기, 아이 돌보기, 구속자석방운동하기, 시위에 참여하다 붙잡혀 즉결심판에 넘어가 구류를 살며 세월을 이겨왔다고 밝혔다.
김문수 도지사와 아내 설난영씨의 결혼사진
[사진=김문수 블로그]

김 도지사와 설난영씨가 결혼 할 그 당시, 실업 상태인 김 도지사를 설난영씨의 아버지께서 걱정하시며 “자네가 어떻게 우리 딸을 먹여 살릴거냐” 고 물으니, 김 도지사는 “만인을 위해 살려고 하는데 한 여자를 못 먹이겠냐”고 명언을 날렸다고 하니 청년 김문수의 배짱과 의지가 드러난다.

이어 설난영씨는 “힘들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눈물을 닦아주고, 늘 곁에서 고통을 덜어주려고 애쓰는 인간, 남편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나는 존경한다”고 밝혔다.

또한 설난영씨는 정치인 아내의 자세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정치인 아내는 역시 직함없는 정치인, 반은 공인 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눈높이를 항상 위보다 아래에 두고, 내 뜻보다 상대, 귀를 늘 열어 민심을 듣고 남편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고, 매일 매일 평가 받는다는 생각을 한다”고 밝혔다.
최란 기자/orchid@heraldcorp.com

다음은 김문수 도지사의 아내 설난영씨 글의 전문


970년대 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노동운동가였던 두 사람은 경찰의 수배, 구속, 고문, 석방 등 마치 드라마 속 이야기같은 인생역정을 함께 나누며 만나 서로의 반려자가 되었었죠.

 

당시 수배자에 실업자 였던 김문수 지사에게 “자네가 어떻게 우리 딸을 먹여 살릴거냐”며 딸의 앞날을 걱정하던 친정아버지에게 “만인을 위해 살려고 하는데 한 여자를 못 먹이겠냐”고 했던 김문수 지사의 말을 명언으로 기억하고 있는 설난영 여사. 정치가의 아내로서, 때로는 친구, 뜻을 함께 하는 동반자로 살아오며 “다툼과 섭섭함은 책을 또 써야한다”는 설 여사에게 김문수,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요.


 1978년 6월 세진전자 노조위원장으로 선출되고, 얼마 후 전국금속노동조합 남서울지역지부 여성부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노조는 산별노조형식에 지역지부가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어 자주 영등포역 앞에 있던 금속노조남서울지역지부 사무실을 드나들며 노조활동을 하던 중, 1978년 8월경 어느 날, 김문수씨가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 직무대행으로 사무실을 드나들었다.

 

 

나는 그때 지역지부 여성부장이었고, 김문수씨는 지역지부 청년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어, 일주일에 한번 이상 회의 때 마다 서울 영등포에 소재한 상급단체인 지역지부 사무실에서 만날 수 있었다. 당시 지역지부 산하 노조가 약 50개 정도 였는데, 20대 인 내가 볼 때 노조위원장들은 대체로 40~50대로 연배가 있었다.

 

 

처음에 청색 작업복을 입고 사무실에 나타난 김문수란 사람은 참으로 맑고, 신선하고, 똑똑하게 보였고, 열정적으로 보였으며, 솔직해 보였고, 직선적이었다. 때론 순수한 아이같은 느낌도..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주머니에서 껌을 나눠주는 친절함까지.. 자랑하고픈 내동생 같았다.

 

 

이후 서로 생각이 맞는 몇몇 노조와 연대해서 공부도 하고 단합대회도 가고 다양한 활동을 병행하며 나는 노조위원장으로서 보람과 신념을 갖게 되었다. 힘들게 장시간 일하며 저임금에 고통 받는 노동자들을 생각할 때, 다짐도 했다. 내 삶의 목표로서, 이 노동자들을 위해 내가 정의로운 대변자 역할을 해야겠다고 ..그때, 김문수위원장은 함께 활동했던 많은 이들에게 큰 힘이 되고, 용기를 주고 ,노조와 관련된 여러 이론적인 뒷받침을 해 주었고, 보이지 않게 다들 의지하는 마음이 생겼다.

 

 

1979년 12월 경, 느닷없이 “갈 데 없으면 나 한테 시집오라”며 차 한잔 시켜놓고 청혼을 했다. 나는 “노동조합을 계속해야 되기 때문에 독신으로 살 것이며, 김문수란 사람을 결혼 대상으로 한번도 생각을 안 해 봤다”고 너무나 담담하게, 건조하게, 멋없이,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 했다. ,평소에 내 소신대로..

 

 

그로부터, 한 달이 안 돼 김문수씨는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어 온갖 억측과 유언비어가 난무한 가운데 40여일 후 어느 날, 혜성처럼 당당하게 나타났다. 대학 다닐 때, 선,후배들과 함께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써클에 관련되어 70여명이 동시에 경찰청 남영동 대공분실에 연행되어 갖은 고문을 당한 후,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42일만에 선배들 몇 명은 기소되고, 김문수씨와 대부분은 모두 무혐의로 함께 풀려나왔던 것이다.

 

 

김문수씨는 구속되어 있던 중, 대공분실에서 회사에 와서 “김문수는 빨갱이다.”며 설명해주고, 회사에서는 한일도루코 노조간부 50여명을 해고했다. 해고된 간부들은 명동성당으로,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로 찾아다니며, 구명운동을 하던중 갑자기 김문수씨가 석방되어 회사앞으로 출근하러 나오니, 아침 출근하던 수백명이 김문수씨를 에워싸고 회사안으로 들어가서 파업농성이 벌어졌다.

 

 

5일정도 파업이 진행되는 중에 나와 우리 영등포지역지부 간부들이 지원방문도 하였다. 파업결과 김문수씨와 해고된 50여명은 전원 복직되고, 임금인상도 대폭 이루어졌다. 김문수위원장은 구속-해고-석방-파업-복직과정을 거치며, 일약 스타가 되었다.

 

 

이후, 우리 젊은 노조위원장들 10여명은 남서울지역지부 민주화를 위해 영등포지역지부사무실에서 철야농성을 보름이상 계속하였다. 여의도 노총민주화 농성에도 동참하며 1980년의 봄 민주화운동을 힘차게 펼치던 중, 어느날 갑자기 5.18쿠데타가 일어나고, 광주에서 항쟁이 있어, 우리는 다시 해산하고 각자 현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 뒤 우리 둘은 함께 노조위원장직에서 강제로 쫓겨나게 되었다.

사표내지 않으면, 삼청교육에 잡아가겠다는 것이다.

 

 

각자 노조위원장직을 그만 두고, 현장에서 일을 하는데, 김문수씨는 곧 해고되어 1980년 11월 삼청교육대상으로 수배되고, 한일도루코노조 부위원장과 간부 4명은 합동수사본부로 강제 연행되었다가, 부위원장은 김문수씨 대신에 삼청교육대로 끌려가서 1981년 계엄해제될 때까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석방되었다.

"만인을 위해 살려고 하는데 한 여자를 못 먹이겠냐"

 

김문수씨는 수배되어 칫솔 한자루만 주머니에 넣고 친구들 집을 찾아 피신하다가, 어느 날 내가 동생들과 운영하던 마포 제과점으로 찾아왔다. 피신할 데가 없으니 몸을 잠시 의탁하자고 하는데, 나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후, 우리는 밀고 당기다가 결혼으로 까지 진전을 보게 된다. 그 당시, 남편은 실업 상태여서 친정 아버님께서 걱정하시며 “자네가 어떻게 우리 딸을 먹여 살릴거냐” 고 물으니, 김문수씨 왈 “만인을 위해 살려고 하는데 한 여자를 못 먹이겠냐”고 명언을 날렸다.

 

 

우리 결혼식은 당시 시대상황 만큼이나 유별났다. 청첩장도 없었다. 주례는 같이 노조민주화운동을 하다가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서,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대한전선노조위원장 한달수씨가 맡아 주셨다. 사회는 동양강철노조위원장을 하다가 군사정부에 의해 우리와 함께 쫓겨난 최웅길씨가 맡았다.

 

 

식장은 한달수씨가 장로로 있던 봉천사거리 봉천중앙교회 교육관에서 가족과 노조원들과 소박하게 치렀다. 당시는 명동위장결혼사건 직후라, 우리들이 위장결혼식을 하며, 서울대생들과 함께 연대 시위할거 라며 서울대입구 지하철역에 경찰 망차가 5대나 배치되어 대기하였다고 후에 담당 형사가 말했다.

 

 

나는 웨딩드레스도 보다 평상복인 원피스를 입고,. 우리는 일체의 형식을 배척하는 혁명적인 결혼식을 하고 싶었다. 우리 둘은 민주적 가정을 이루고, 남녀평등의 상징으로서 손을 맞잡고 함께 동시입장을 하였다.

 

 

남편은 삼청교육에서 풀려난 노조간부들의 사랑방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작은 서점을 서울대학 입구에 열었다. 그 때 우리는 돈이 너무 없어서, 운동권출판사를 모두 찾아다니며 책을 빌려 책꽂이를 겨우 조금씩 채울 수 있었다. 장사는 사실 밥 먹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결혼 후 우리는 봉천사거리 근처에 단칸방 하나를 얻어서 살림을 시작했다. 나는 세진전자 현장에서 일하다가, 결혼 후 1년 아이를 출산하고 나서 아이를 맡길 데가 없어, 할 수 없이 회사를 사직하고, 서점을 운영하였다.

 

 

남편은 장사 보다 노동운동에 더 관심이 많아 사실상 서점운영은 내 몫이 되어버렸다. 우리 서점에는 구속자가족과 수배자들이 드나들며 함께 하였다. 때로는 집회와 시위에도 참여하였다. 남편은 서점을 하며, 성남 상대원동에 있는 분도수녀원에서 운영하는 노동자교육상담기관인 “만남의 집”에 노동법 강사로 다니며, 카톨릭노동청년회나 전국노동자상담교육기관에 교육을 다녔다. 남편은 전국해고자들과 모여 “노동자복지협의회”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도 맡아서 청계노조의 뒷받침을 하였다. 따라서 우리 책방에는 매일 담당형사가 동향감시를 하였다.

 

 

남편은 카톨릭, 기독교, 해외지원기관의 도움을 받아, 전국 각 공단주변에 노동자자녀 탁아소를 청계천, 구로공단, 부평, 부천, 마산, 부산, 대구, 대전 등 여러 곳에 열었다. 하나뿐인 우리 딸은 3살 때부터, 월요일에 맡기고 토요일에 데려오는 여성노동운동가들이 운영하는 탁아소에 맡겨졌다. 남편은 구속, 아이는 탁아소, 우리 가족은 뿔뿔이 이산가족으로 수 년을 살았다.

 

남편은 1985년 구로동맹파업 이후 수배되어 집에 들어오지 못한 채 숨어다니며 활동을 하다가, 1986년 5월 3일 직선제개헌투쟁을 인천에서 하던 날 서울노동운동연합 간부들 13명이 한꺼번에 다 잡히게 되었다. 군 부대인 보안사 장지동분실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접하고 보안사로 찾아갔을 땐 이미 일주일이 지나 6개 경찰서로 이첩이 된 뒤였다. 처음 면회할 때 남편이 주동자였기 때문에 고문을 많이 당해서, 얼굴이 퉁퉁붓고 온 몸에 멍이 들고 통증 때문에 말을 못했다. 런닝셔츠에는 고문의 흔적으로 핏자국이 여기저기 남겨져 있었다, 지금도 그 셔츠를 보관하고 있다.

 

 

남편은 서울구치소, 안양교도소, 목포교도소, 광주교도소 전국을 이감 당하며 2년 6개월만에 수감생활을 끝내고 개천절 특사로 출소하였다. 남편이 옥중생활하는 동안 나는 서점에서 장사하기, 아이 돌보기, 전국 교도소로 남편 옥바라지하기, 구속자석방운동하기, 시위에 참여하다 붙잡혀 즉결심판에 넘어가 구류살기, 정신없이 세월이 지나갔다

"힘들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눈물을 닦아주고, 늘 곁에서 고통을 덜어주려고 애쓰는 인간, 남편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나는 존경한다."


아이가 7살, 유치원 입학할 때가 되어 집으로 돌아와 모처럼 한 가족이 모였다.

 

지금 생각하면 지난 세월이 모질고 힘들어 다시 돌아 가고싶지 않은데, 그 당시에는 그렇게 사는게 최고의 가치이고, 정도로 알았기에 당연히 받아드리며 힘든 줄도 모르고, 변화된 세상에 조금은 위로를 받는다.

 

 

처음 정치를 시작할 땐 반대도 했지만, 정치를 하는 동안 남편 뜻에 따라 최선을 다했다.왜.. 70~80년대 경제성장의 산업역군인, 힘들게 일하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을 외면하지 않고 분노하며, 온 몸을 던져 개선하고자 했던 남편, 사회 민주화를 위해 두려움 없이 용기있게 투쟁하던 모습, 누가 뭐라고 해도 꿋꿋하게 항상 교과서대로 바르게살기를 실천한 인간이기에.. 방법은 다르지만, 힘들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눈물을 닦아주고, 늘 곁에서 고통을 덜어주려고 애쓰는 인간, 남편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나는 존경한다.

 

 

어느 국회의원이 자서전에 “김문수는 영혼이 맑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내인 나도 동의한다. 물론 남편과 살아오면서 성격상 많은 다툼과 섭섭함은 책을 또 써야 되지만, 그 때마다 서로 잘해보자며, 노력하자며 손을 내민다.

 

 

정치인 아내는 역시 직함없는 정치인, 반은 공인 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눈높이를 항상 위보다 아래에 두고, 내 뜻보다 상대, 귀를 늘 열어 민심을 듣고 남편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고, 매일 매일 평가 받는다는 생각을 한다.

 

 

과거 노동운동은 그런 의미에서 내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노동운동의 경험은 내 인생관 ,세계관에 변화를 주고 삶에 무게를 더욱 진지하게 해준다. 또한 매 순간 갈등도 하게 한다. 참으로 소중하고 감사할 일이다.

 

 

나는 지금도 어쩌면 그 연장선이라 생각한다. 현장에서 힘들고 어려운 우리 노조원을 대변한 것처럼, 우리 지역의 모든 이들이 우리 조합원 같은, 그래서 그들의 어려움을 듣고, 신음을 듣고, 고통을 듣고, 호소를 듣는 귀가 되어, 남편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고, 함께 아파하며, 해결해 줄 수 있는 협조자가 되고 싶다.

모질게 살아온 남편과 나의 삶이기에 지금의 우리는 매 순간을 소중히, 보이지 않은 신에게 너무 감사한 마음으로 즐겁게 일하고 있다. 남편은 지금껏 살아 온 역사가 있기에, 앞으로도 무엇이 되고자 얻고자 사는 게 아니라 주어진 자리,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며 자신을 비울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을 너무나 소중히 생각하고, 만족하며, 남편 곁에서 내조자로서 나의 경험을 발판 삶아 최선을 다 할 것이다.

  

2011년 1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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